2009년 12월 9일 수요일

내 나이는 지금...

지금 내 나이는 ?

1세 - 누구나 비슷하게 생긴 나이.
2세 - 직립보행을 시작하는 나이.
3세 -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나이.
4세 - 떡잎부터 다른 나이.
5세 - 유치원 선생님을 신봉하는 나이.
6세 - 만화 주제곡에 열광하는 나이.
7세 - 아무데서나 춤을 춰도 귀여운 나이.
8세 - 편지를 쓸 수 있는 나이.
9세 - 세상을 느낄 수 있는 나이.
10세 - 관찰일기를 쓰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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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할아버지에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선물하는 나이.
12세 - 돈의 위력을 알만한 나이.
13세 - 밀린 방학일기를 한꺼번에 쓰는데 익숙한 나이.
14세 - 얼굴에 하나, 둘 여드름 꽃이 피기 시작하는 나이.
15세 - 운동장에 누워 ‘한게임 더’를 외칠 수 있는 나이.
16세 - 의무 교육과정이 끝나는 나이.
17세 - 세븐의 ‘와줘’를 목청 높여 열광하는 나이.
18세 - 입시 스트레스로 치를 떠는 나이.
19세 - 어떤 영화도 볼 수 있는 나이.
20세 - 배낭여행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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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 사과같은 얼굴을 만들기 위해 변장하는 나이.
22세 - 몸무게에 민감한 나이.
23세 - 가끔 카드 연체료를 내기 시작하는 나이.
24세 - 후배들에게 사회 정의를 넘기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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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 - 이것저것 다해도 시간이 부족한 나이.
26세 -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내는 나이.
27세 -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을 보기 시작하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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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 엄지 손가락 하나로 문자 보내기 힘든 나이.
29세 - 아무리 변장을 해도 진짜 물좋은 곳에는 못가는 나이
30세 - 클래식의 선율에 귀가 반응하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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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 아직 29세라고 우길 수 있는 나이.
32세 - 젊은 애들과 있으면 노장이라는 말을 듣는 나이.
33세 - 바이러스 걸린 컴퓨터를 너끈히 들 수 있는 나이.
34세 - 꾸준히 민방위 훈련을 받을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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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 이제 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엄청 느끼는 나이.
36세 - 절대 E.T 생각을 못하는 나이.
37세 - 가족을 위해 캠코더를 사러가는 나이.
38세 - 책과 매우 멀어지는 나이.
39세 - 서서히 편안한 여행만 찾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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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 좋은 차에 유혹을 버릴 나이.
41세 - 가끔은 주책바가지 짓을 해서 남을 웃기는 나이.
42세 - 학교 때 배운 물리 공식을 까맣게 잊는 나이.
43세 - 영어 완전 정복을 포기하는 나이.
44세 - 약수터의 약수물도 믿지 않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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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 - 변기에 앉아 돋보기 안경을 찾는 나이.
46세 - 남자도 화장을 해야겠다고 느끼는 나이.
47세 - 싸울 일이 있으면 자리를 피하고 보는 나이.
48세 - 통계학적으로 돈을 제일 많이 버는 나이.
49세 - ‘누구는 덕이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나이.
50세 - 다큐채널을 즐겨 보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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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세 - 약한 자의 아픔을 보는 나이.
52세 - ‘거 참 이상하다’라는 대사를 중얼거리는 나이.
53세 - 누구도 ‘터프가이’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 나이.
54세 - 꿈의 왕국을 꿈 속에서 보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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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 - 근육도 광택제를 발라야 빛나는 나이.
56세 - 아파트가 싫어지는 나이.
57세 - 슬슬 하느님, 부처님을 찾는 나이.
58세 - 가끔 늙어서 복 터진 사람을 만나는 나이.
59세 - 성골, 진골이 아니면 뭐든지 힘들다고 생각하는 나이.
60세 - 좋은 일이 있어도 건강이 걱정되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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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세 - 절대로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되는나이.
62세 - 삼사십대 여자가 무서워 보이는 나이.
63세 - 엽기에도 무감각해지는 나이.
64세 - 무리하면 바로 쓰러지는 나이.
65세 - 긴 편지는 두 번을 읽어야 이해가 가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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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세 - 학원 간 손자를 기다리는 나이.
67세 - 동갑내기 할아버지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나이.
68세 - 생각을 뒤집으면 민망해 보이는 나이
69세 - 상을 받을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나이.
70세 - 대통령 이름을 그냥 불러도 건방짐이 없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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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세 - 전설을 쓰기 시작하는 나이.
72세 - 서서히 하늘과 가까워지는 나이.
73세 - 누가 옆에 있어도 방귀를 뀔 수 있는 나이.
74세 - 잘못을 해도 구속되지 않는 나이.
75세 - 살아온 이야기로 돈을 벌 수 있는 나이.
76세 - ‘옹’자를 붙여주는 나이.
77세 - 콘돔없이도 sex를 즐길 수 있는 나이.
78세 - 대사가 있으면 절대로 영화에 출연할 수 없는 나이.
79세 -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마지막인가’를 생각하는 나이.
80세 - 아무에게나 반말을 해도 괜찮은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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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세 - 이 자식이 뉘집 자식인지 잘 모르는 나이.
82세 - 뭘 하려고하면 주변 사람들이 괴로운 나이.
83세 - 말을 안해도 은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나이.
84세 - 미물도 사랑스런 나이.
85세 - 칼을 들이대도 무서워하지 않는 나이.
86세 - 무슨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는 나이.
87세 - 귀신을 봐도 놀라지 않는 나이.
88세 - 뛴다고 생각하는데 걷고 있는 나이.
89세 - 얼굴 주름을 볼 수도 없는 나이.
90세 - 주민등록번호를 잊어버리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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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 나이 자체가 작품이 되는 나이.
92세 - 게임의 룰을 지킬 수 없는 나이.
93세 - 한국말도 통역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나이.
94세 - 사람이 왜 ‘무형문화재’인지를 보여주는 나이.
95세 - 무엇을 하던 주위에서 신기하게 보는 나이.
96세 - 간지러운 코도 다른 사람이 긁어주는 나이.
97세 - 노인대학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나이.
98세 - 누가 아버지인지, 누가 아들인지 구별이 안가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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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세 - 가끔 하나님과도 싸울 수 있는 나이.
100세 - 인생의 과제를 다하고 그냥 노는 나이.

ㅡ 모셔 온 글 ㅡ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rebuilding the world

The new keynote "Rebuilding the World" by Don Tapscott from Sogeti VINT on Vimeo.

wikinomics

grown up digital

wikinomics

grown up digital

2009년 11월 22일 일요일

어느 어머니가 결혼하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아들아!
결혼할 때 부모 모시겠다는 여자 택하지 마라.
너는 엄마랑 살고 싶겠지만
엄마는 이제 너를 벗어나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단다.
엄마한테 효도하는 며느리를 원하지 마라.
네 효도는 너 잘사는 걸로 족하거늘….

네 아내가 엄마 흉을 보면
네가 속상한 거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걸 엄마한테 옮기지 마라.
엄마도 사람인데 알면 기분 좋겠느냐.
모르는 게 약이란 걸 백 번 곱씹고
엄마한테 옮기지 마라.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널 배고 낳고 키우느라 평생을 바쳤거늘
널 위해선 당장 죽어도 서운한 게 없겠거늘…
네 아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조금은 이해하거라.
너도 네 장모를 위하는 맘이 네 엄마만큼은 아니지 않겠니.

혹시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거든 조금은 보태주거라.
널 위해 평생 바친 엄마이지 않느냐.
그것은 아들의 도리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독거노인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는데 자식인 네가 돌보지 않는다면
어미는 얼마나 서럽겠느냐.
널 위해 희생했다 생각지는 않지만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이 들지 않겠니?

아들아!
명절이나 어미 애비 생일은 좀 챙겨주면 안되겠니?
네 생일 여태까지 한 번도 잊은 적 없이
그날 되면 배 아파 낳은 그대로
그때 그 느낌 그대로 꿈엔들 잊은 적 없는데
네 아내에게 떠밀지 말고 네가 챙겨주면 안되겠니?
받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잊혀지고 싶지 않은 어미의 욕심이란다.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름만 불러도 눈물 아릿한 아들아!
네 아내가 이 어미에게 효도하길 바란다면
네가 먼저 네 장모에게 잘하려무나.
네가 고른 아내라면
너의 고마움을 알고 내게도 잘하지 않겠니?
난 내 아들의 안목을 믿는다.

딸랑이 흔들면 까르르 웃던 내 아들아!
가슴에 속속들이 스며드는 내 아들아!
그런데 네 여동생 그 애도 언젠가 시집을 가겠지.
그러면 네 아내와 같은 위치가 되지 않겠니?
항상 네 아내를 네 여동생과 비교해 보거라.
네 여동생이 힘들면 네 아내도 힘든 거란다.
내 아들아 내 피눈물 같은 내 아들아!
내 행복이 네 행복이 아니라 네 행복이 내 행복이거늘
혹여 나 때문에 너희 가정에 해가 되거든 나를 잊어다오.
그건 어미의 모정이란다.
너를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어미인데
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들 아깝겠느냐.
물론 서운하겠지 힘들겠지 그러나 죽음보다 힘들랴.

그러나 아들아!
네가 가정을 이룬 후 어미 애비를 이용하지는 말아다오.
평생 너희 행복을 위해 애써 온 부모다.
이제는 어미 애비가 좀 편안히 살아도 되지 않겠니?
너희 힘든 건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다오.
늙은 어미 애비 이제 좀 쉬면서 삶을 마감하게 해다오.



너희 어미 애비도 부족하게 살면서 힘들게 산 인생이다.
그러니 너희 힘든 거 너희들이 헤쳐가다오.
다소 늙은 어미 애비가 너희 기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건 살아오면서 따라가지 못한 삶의 시간이란 걸
너희도 좀 이해해다오.

우리도 여태 너희들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니.
너희도 우리를 조금,
조금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 안 되겠니?
잔소리 같지만 너희들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렴. 우린 그걸 모른단다.
모르는 게 약이란다.

아들아!
우리가 원하는 건 너희들의 행복이란다.
그러나 너희도
늙은 어미 애비의 행복을 침해하지 말아다오.
손자 길러 달라는 말 하지 마라.
너보다 더 귀하고 예쁜 손자지만
매일 보고 싶은 손자들이지만
늙어가는 나는 내 인생도 중요하더구나.
강요하거나 은근히 말하지 마라.
날 나쁜 시어미로 몰지 마라.

내가 널 온전히 길러 목숨마저 아깝지 않듯이
너도 네 자식 온전히 길러 사랑을 느끼거라.
아들아 사랑한다.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그러나 목숨을 바치지 않을 정도에서는
내 인생도 중요하구나….

2009년 11월 1일 일요일

2009년 9월 26일 토요일

teaching and understanding


2009년 7월 25일 토요일

Nobel Lectures

2009년 7월 21일 화요일

2009년 7월 18일 토요일

2009년 7월 5일 일요일

거가 대교

환경운동보다 먼저 해야 할 "생명 살리기" - 성법 스님

정치적 영향을 받는 시민단체와 달리, 종교단체인 불교계에서 대외적으로 가장 적극적인 '의사 표명'을 일관성있게 하는 분야가 환경문제입니다.

천성산 지킴이로 지율스님이 보여준 모습은 결과를 떠나, 많은 이들에게 개인의 신념이 이렇게 강하게 표현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현 정부 들어서 환경문제의 최대의 현안은 4대강 사업입니다. 경인 운하나 4대강 사업이 대 운하를 염두에 둔 사전 작업이라든가, 4대강 사업 자체만하더라고 불필요하다는 논쟁은 나의 주관심사는 아니고, 더욱 그와 같이 방대하고 범국가적 사업의 타당성을 출가자 중 한명인 내가 감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조차가 토목과 환경전문가를 무시하는 일이 됩니다.

이 일에 앞장서는 분은 수경스님입니다.
지난번 촛불집회에 이어 시청 앞 광장에서 수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현 정부의 종교편향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불교 대표로서의 수경스님의 낭독문을 듣고, 참 글을 잘 쓰시는 분이고 본받을 만 한 스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국가 단위로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과정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자유-인권-환경 이것이 전형적 패턴입니다.
이것은 국민의 정치적 경제적 수준의 도달에 따라 그 취미와 기호가 바뀌는 '틀'과 같은 문화 현상입니다.

예를 들면 위스키 중심의 양주에서 와인으로 술 문화가 변화 된다든가, 골프가 특권층의 운동이 아니라 대중화 된다든가, 클래식 등 오페라 공연이 일반화 된다든가, 이런 식으로 거의 통계와 지표로 기준삼아 환산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국가나 인종의 차이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러니 불교계에서도 환경에 발언권을 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한편, 자유와 인권은 개인의 절대적 가치라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만, 환경은 상대적이고 개인의 이익이 직결되어 있어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순전히 경제성만 놓고 따진다면 천성산 지킴이 지율스님 때문에 입은 경제적 피해가 1조 단위를 넘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제적 가치 판단의 근거를 달리하는 것이 결국 환경운동의 명분이기도 합니다.습지 자체의 경제적 가치와 그곳을 고속도로로 통과시켰을 때의 경제적 가치를 비교하듯이 말입니다.

어쨌든 환경운동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계의 중생을 위한 동사섭(同事攝)으로서의 지금과 같은 환경운동에는 이의를 제기할 점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우선 환경운동가들은 정치적 성향을 앞세우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자랑스런 수경스님이 나라면 엄두도 못 낼, 국토 종단 3보 1배는 감동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요즘은 환경 운동의 구호 끝에 '현 정권은 독재에 가깝다'라는 정치적 구호를 넣어,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환경 운동은 본질적으로 개발을 집행하는 정부나 기업측과 대립 관계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능히 감싸줄 수 있지만, 환경의 범주를 벗어나는 지극히 정치적 사안에 대한 '단언적' 공개 발언은 동의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조금 더 출가자다운 세련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리고 창피한 말이지만 불교 자체 내의 환경파괴 문제는 전혀 거론하지 않는 것도 모순입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책임소재를 따지기 어렵기에 일 예를 들겠습니다.

강화 보문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 도량입니다.
자연석에 부조된 관세음보살상 앞에 이르면 서해가 한 눈에 들어 옵니다.그런데 이 관세음보살상은 대웅전보다 꽤 높은 곳에 있습니다. 마치 대구 선본사 '갓바위' 약사불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관세음보살상에 이르는 길이 대리석인지 화강암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반 빌딩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해놨다는 것입니다.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듯 주변의 경관과 어울리도록 계단을 만드는 것이 당연한 상식인데 왜 그렇게 했는지 '울화'가 치민 경험이 있습니다.

더욱 보문사의 계단은 눈이 조금이라도 오면 미끄러져 낙상할 만큼 맨질맨질 하였고, 중간에는 시주자가 누구인지를 아주 어색할 정도로 크게 '공고'해 놨었습니다.

결국 사찰은 합법적으로 누구의 반대도 없이 불사라는 명목으로 사찰 주변 환경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불교계의 환경 운동하는 스님들조차 이를 막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전향적인 '생명 살리기' 운동을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환경 운동은 그 시작과 끝이 생명 살리기에 있습니다.
환경이 망가지면 결국 그 과보로 인간에게 피해가 온다는 말을 반대할 수 있는 명분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아마 그 반대로 환경에 대한 보존의 타당성이 점점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불교는 이제부터 생명 살리기의 '생명'을, 같이 사는 인간에게 우선권을 주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자연 파괴하여 아파트에 살 우선권을 주자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룡뇽 살리고, 개구리 살리는 데 쏟을 힘을 자력 생존이 불가능한 '중생'들에게 쏟고, 환경 운동은 남는 힘 가지고 하자는 말입니다.

동물이 인간보다 더 자비를 받아야 할 우선 대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이엠에프와 작년부터의 경제난으로 국민의 일부 계층은 하루의 생존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슬픔으로 암울한 사람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습니다.

더욱 이런 사람들은 늘어가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이들은 정부의 빈곤층 통계에도 잡히질 않습니다.

대학병원에는 암등 치료가 계속되지 않으면 죽음이 뻔한데도, 치료비는커녕 하루 하루 연명할 기초적 생활비조차 없어 망연자실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이게 어찌 병든 사람만의 일이겠습니까?
곳곳에 '생명 보존'의 자립이 안 되는 우리 이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이들을 돌본 후에 환경도 돌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재보기에는 사안이 의식주 걱정 안하는 스님들의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제안하건데, 우선 각 본사에서만이라도 사찰에 등록된 신도가 기초 생활의 능력이 안 되는사람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당장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2009년 7월 4일 토요일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

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고 영감을 받은 멘토들은 '그건 내가 잘 모르겠는데, 너는 아니?' 라고 내게 되묻는 현인(賢人)들이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데에서 진정한 지혜와 독창성이 시작된다." - John Maeda (RISD 총장)

2009년 7월 3일 금요일

2009년 7월 2일 목요일

한국 목사의 수준과 전도 방식




세종대왕의 깊은 뜻을...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깊은 뜻을!

가능하면 한자어를 쓰지 않으면 우리 말의 발전이 빨라진다?

정창인 자유통일포럼 대표


요즘도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가끔 길을 묻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아직 ‘언문’도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이다. 지하철 길 안내가 한글로 되어 있지만 이들은 그 한글조차 깨치지 못해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쉬운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상당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지 모르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 사람들에게 길을 가리켜주기가 쉽지는 않다. 다행히 지하철 노선마다 다른 색의 띠를 사용해 길 안내를 하고 있기에 어느 색 띠를 따라가면 된다고 일러주지만 아마도 그 사람은 제대로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아직도 몇 사람에게 더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아직도 한문을 쓰고 있다면 아마 국민의 99%가 이 한글도 모르는 지하철 승객과 같으리라. 불편한 점이 단순히 길을 묻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에게 안부를 물을 방도도 없을 것이며 각종 공고문을 읽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뉴스조차 읽지 못할 것이다. 눈은 있으되 글을 읽을 수 없어 눈뜬 장님행세를 해야 할 사람이 국민의 99%가 된다고 가정해보자.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은가.

세종대왕께서 562년 전에 백성이 이런 황당한 일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한글을 창제하셨다. 세종대왕의 뜻은 우리 말이 중국말과 달라 서로 잘 통하지 않으므로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누구나 쉽게 익혀 날로 편하게 쓰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큰 뜻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상민(常民)이 쉽게 글을 쓰고 읽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던 양반(兩班)들은 한자 사용을 고집하였다. 그래서 구한말까지도 행세께나 한다는 사람들은 한글은 ‘언문’이라고 하여 천대하고 한문을 ‘진문’이라고 하여 굳이 그 어려운 한문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어려운 한문을 아는 것 자체가 지위와 연관된 것으로 여겼다.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상민은 한문을 배울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오직 종을 부리는 양반만이 시간을 들여 한문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문은 말하자면 일종의 신분 증명서와 같았다.

요즘도 아직 한자(漢字)를 쓰지 않으면 마치 의사전달이 되지 않는 것처럼 또는 글의 품위가 없다거나 지능을 나쁘게 한다는 등의 얼토당토 않은 이유를 내세워 한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배운 사람들 중에서,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중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한자를 익히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없다. 억울하면 배우라는 식이다.

그런데 한자를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자를 좀 안다고 글을 쓸 때에 한자를 섞어 쓴다면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그 글을 읽을 수가 없다. 그 글을 읽을 수 없으니 우리 글이라고 하면서도 우리가 읽지 못하는 글이 되고 만다. 그래도 이들은 한자를 써야 한다고 우긴다. 내가 아는데 너는 왜 모르느냐, 또는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하는 태도다.

한문을 오래 쓴 전통으로 인해 당장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불편한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는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 병기하면 된다. 글 쓰는 사람의 의도가 잘 전달될 뿐만 아니라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그 글을 읽는데 어려움이 없다. 만약 뜻을 모른다면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된다. 그런데 한자를 섞어 쓰게 되면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옥편부터 찾아야 한다. 그 글을 읽기 위해 한 단계 더 노력해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 쓰기만 하면 쉬울 것을 굳이 옥편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작은 배려조차 거부하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한자를 꼭 섞어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할 때는 왜 한자를 꼭 섞어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된다. 우리 글을 쓰면서 꼭 한자가 필요하다면 말할 때도 꼭 한자를 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말할 때 상형문자의 도움이 없어도 의사전달이 된다면 굳이 글 쓸 때에도 한자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한자를 배우지 않아도 언어생활이 완전할 수 없으며 한자를 사용하여도 완전할 수 없다. 한자를 모르면 한자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으며 한자를 섞어 쓰면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 읽을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한자어를 피하도록 노력하되 꼭 써야 할 경우에는 한자를 괄호 속에 넣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남에 대한 배려다.

가능하면 한자어를 쓰지 않기로 하면 우리 말의 발전이 빨라진다. 한자는 우리 말을 대체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한자는 쓰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 말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된다. 한자 사용으로 인해 죽었던 우리 말도 되살아 날 것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 562돌을 맞아 다시 한번 세종대왕의 높은 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다음의 훈민정음 서문을 우리 말과 한문으로 쓴 것을 비교해보자.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아 아직도 우리가 한문을 써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가.

아직 한글도 깨치지 못해 길을 물어야 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왜 한자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배운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자의 해독능력이 교육 연수와 비례한다면, 한자는 그 자체가 불평등한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등한 사회에서 불평등한 글자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정창인 자유통일포럼 대표: http://unifykorea.net/]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新制二十八字,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한글은 얼마나 우수한 문자일까?

2009년 7월 1일 수요일

종교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일을 하는 좋은 사람과 악한 일을 하는 나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

Steven Weinberg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New York Times, April 20, 1999.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편: 난 당신과의 결혼을 후회한다...

아내: 앵? 당신, 진짜로 나와의 결혼을 후회 해?

남편: .... 응.... 가끔은...
...
...
...
아내: 난 만족하는데...
...
...
...

아내: 아주 가끔은...

2009년 6월 24일 수요일

shi yong xin

2009년 6월 17일 수요일

토론의 방법

토론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김정호의 성공일기 090618

오늘은 공사의 구분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저의 목표는 대한민국을 성공시키는 것. 저의 변해가는 모습과 제가 성취해가는 모습을 보여드림으로써 많은 분들의 마음을 움직여야만 가능한 목표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 개인적 차원에서 해야 할 일들이 큰 부분을 차지해가는 군요. 이러다가는 회사를 개인적 목적에 이용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과 사를 나누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눠야 하겠습니다.

어제 점심 시간에는 토론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곽은경 팀장이 뵙자고 청한 분인데, 저보고도 한번 만나보라고 하길래 긴가민가하며 점심 자리에 나갔습니다. 토론을 과연 학문으로 가르칠 수도 있나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막상 만나고 나니 뵙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한 문장 또는 한 단어로 압축하는 연습을 하라. 그 문장을 먼저 말하고 그 뒤는 부연설명이 되게 하라. 충분한 증거자료와 사례를 준비하라. 청산유수로 말을 잘한다고 토론을 잘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임을 잊지 마라. 상대방을 합리적 토론의 상대로 인정하라. 상대방을 무시하면 그 마음이 표정과 태도에 드러나게 된다. 핵심적인 메시지는 조금 느리게 말하고, 증거나 사례는 빨리 말라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로 저보고는 말이 조금 빠르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주시더군요. 말이 너무 느리면 지루하기도 하려니와 권위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답니다.

이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토론 상대방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그 과정을 통해서 시청자를 설득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군요. 가르침을 주신 장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2009년 5월 3일 일요일

2009년 4월 30일 목요일

고민은 10분을 넘기지 말라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 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대한 것이고
30% 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 는 사소한 사건들,
4% 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즉, 96% 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

고민이 많다고 해서 한 숨 쉬지마라.
고민은 당신의 영혼을 갉아 먹는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아 그대로 실행하라.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면 무시하라.
고민하나 안하나 결과는 똑같지 않는가.

그러므로 고민은 10분만 하라.

잊어버릴 줄 알라.
잊을 줄 아는 것은 기술이라기보다는 행복이다.
사실 가장 잊어버려야 할 일을 우리는 가장 잘 기억한다.

기억은 우리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할 때 비열하게 우리를 떠날 뿐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가장 원하지 않을 때 어리석게도 우리에게 다가온다.

기억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에는 늘 친절하며,
우리를 기쁘게 해줄 일에는 늘 태만하다.

2009년 4월 19일 일요일

박솔지

















2009년 4월 16일 목요일

susan boyle

susan boyle

2009년 4월 12일 일요일

intro to basic meditation

1.

2.

3.

meditation for beginners

1.

2.

3.

meditation for beginners

1.

2.

yoga meditation

1.

2.

3.

4.

5.

2009년 4월 11일 토요일

how to meditate

절 하는 법

불교란 무엇인가?

2009년 4월 7일 화요일

한자의 불편한 특성 정창인

2009. 4. 2.
정창인

글자는 말을 기록하기 위한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졌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말이 먼저 생겼고 그 말을 여러 가지 목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나중에 글자가 생긴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말과 글이라면 소리로 들을 때나 글로 읽을 때 불편함이 없이 같은 의미가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 소리글인 한글과 뜻글인 한자는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말글의 경우, “오늘 하늘이 맑다”라고 말할 경우, 이것은 소리 내어 읽거나 눈으로 읽거나 뜻의 손실이나 불명확한 점이 없이 뜻이 그대로 전달된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완전하다. 그 이유는 우리글이 소리글이다 보니 말하는 그대로 적을 수 있어서 글로서 적어도 전혀 의미의 손실도 없고 불편함도 없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이 예문은 조갑제닷컴에서 “명문 시리즈/학문의 길”에 인용된 것이다. “松竹(송죽)에서 변함없는 節槪(절개)를 보았고 白鷺(백로)에서 티 없는 純潔(순결)을 읊었다.” 이 문장이 그리 좋은 예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자의 불편한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글은 그냥 그대로 소리 내어 읽어서는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반드시 글자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松竹”의 경우, 이것은 그냥 “송죽”이라고 읽기만 하여서는 뜻이 명확하지 않고 오직 소나무 “松”자와 대나무 “竹”이란 글자를 눈으로 확인하여야 그것이 소나무와 대나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송죽”이라고 읽어서는 그것이 소나무와 대나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솔잎을 짓찧어서 짜낸 물, “松粥”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뜻을 알 수 없다. 그 아래에 나오는 “절개”나 “백로”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이 한국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사람들에게도 같은 불편이 존재한다. 단순히 소리로만 ‘메이’(mei, 4성(聲)) 로만 발음할 경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선뜻 알 수 없다. 동일한 발음이 누이 매(妹), 어두울 미(味), 그리고 아첨할 미(媚)를 모두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발음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서는 글자를 눈으로 확인하여야 하는 것이다. 글자를 볼 수 없을 경우에는 그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해야 한다.

물론 이들 글자들이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다른 글자와 함께 쓰일 경우 뜻이 명확해 지지만, 이 경우에는 굳이 한자의 모양을 확인하지 않아도 뜻이 전달된다. 말하자면 상형문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하여 발음됨으로써 소리문자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한자로 쓰더라도 소리글의 경우는 굳이 글자를 보지 않아도 뜻이 전달된다. 예를 들어 커피를 뜻하는 ‘카페이(咖, 口+非)’ 또는 코가콜라를 뜻하는 ‘커커우커러(可口可樂)’의 경우 글자 모양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오직 그 발음만이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면 이런 현상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 조금 더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말은 말로서 서로 다른 의미를 구별하기 위해 서로 다른 발음을 다르게 조합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하늘과 바다’라고 할 경우, 하늘을 나타내기 위해 ‘하’+‘늘’이라는 두 가지 발음을 사용하게 된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자에서는 하늘은 ‘天’, 바다는 ‘海’로 한 글자로 표시한다. 수 많은 뜻을 글자로 구별하려고 하니 자연 글자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앞의 예문에 나온 ‘백로 로(鷺)’자를 보자. 우리말은 해오라기라고 한다. 그러나 해오라기를 한 글자로 표현하려니까 이렇게 복잡한 글자가 생기게 되었다. 만약에 해오라기를 중국 사람들이 足各鳥로 부르기 시작하였다면, 로(鷺)라는 어려운 글자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어생활에도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 애초부터 이렇게 풀어썼다면 그것은 중국말이 소리말이 되고 한자가 소리글로 바뀌었을 것이다.

한자가 배우기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소리글이었다면 간단한 몇 가지의 글자로 말을 표현할 수가 있었을텐데 뜻글이다 보니 다른 뜻을 가진 글자를 일일이 구별해서 만들었어야 하고 따라서 글자가 익히기 복잡해진 것이다. 민중사관에서 발행한 “한자사전”을 보니 가장 획수가 많은 글자가 ‘절’자인데, 이것은 용 용자(龍)를 네 개나 합한 글자다. 그 뜻은 ‘말 많을 절’자로서 말이 많다는 뜻이다. “말이 많다”고 하면 될 것을, 또는 용자를 네 개를 나열해도 될 것을(龍龍龍龍), 이것을 굳이 한 글자로 만들어 놓으니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글자는 그래도 龍자를 네 개를 겹쳐 놓았으니 익히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산 앵도 나무 울’(鬱)자의 경우 비록 전체 획수는 29개이지만, 한 글자를 쓰기 위해 29획이나 긋는다는 것은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익히기도 어렵다. 이 글자 대신에, 예를 들어 木缶木宀鬯彡으로 풀어썼다면, 같은 획수를 사용하지만 익히기에 더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잡한 글자가 생기기 않고 기초가 되는 몇 가지 단순한 글자로 말을 글로 옮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자는 중국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글자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복잡한 획수를 줄인 소위 간체자를 쓴다. 중국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한자가 전혀 다른 언어에 속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어찌 쉽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직도 한자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경제적 여유를 가진 귀족들만이 배울 수 있었던 한자를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배우기에 어려움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자의 특성과 사회의 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한자는 결코 배우기 쉬운 글자도 아니며 우리 말이 한자가 아니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굳이 한자를 쓸 이유가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한자를 썼기 때문에 과도기적으로 겪는 불편을 다른 방법으로 해소하여야 한다. 바로 꼭 필요한 한자는 괄호 속에 넣어 쓰는 것이다.

2009년 4월 4일 토요일

2009년 4월 3일 금요일

Larry Summers, speaking slowly and clearly

financial crisis and globalization - uc symposium

한자의 불편한 특성 - 정창인

2009. 4. 2.
정창인

글자는 말을 기록하기 위한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졌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말이 먼저 생겼고 그 말을 여러 가지 목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나중에 글자가 생긴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말과 글이라면 소리로 들을 때나 글로 읽을 때 불편함이 없이 같은 의미가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 소리글인 한글과 뜻글인 한자는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말글의 경우, “오늘 하늘이 맑다”라고 말할 경우, 이것은 소리 내어 읽거나 눈으로 읽거나 뜻의 손실이나 불명확한 점이 없이 뜻이 그대로 전달된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완전하다. 그 이유는 우리글이 소리글이다 보니 말하는 그대로 적을 수 있어서 글로서 적어도 전혀 의미의 손실도 없고 불편함도 없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이 예문은 조갑제닷컴에서 “명문 시리즈/학문의 길”에 인용된 것이다. “松竹(송죽)에서 변함없는 節槪(절개)를 보았고 白鷺(백로)에서 티 없는 純潔(순결)을 읊었다.” 이 문장이 그리 좋은 예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자의 불편한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글은 그냥 그대로 소리 내어 읽어서는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반드시 글자를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松竹”의 경우, 이것은 그냥 “송죽”이라고 읽기만 하여서는 뜻이 명확하지 않고 오직 소나무 “松”자와 대나무 “竹”이란 글자를 눈으로 확인하여야 그것이 소나무와 대나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송죽”이라고 읽어서는 그것이 소나무와 대나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솔잎을 짓찧어서 짜낸 물, “松粥”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뜻을 알 수 없다. 그 아래에 나오는 “절개”나 “백로”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이 한국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사람들에게도 같은 불편이 존재한다. 단순히 소리로만 ‘메이’(mei, 4성(聲)) 로만 발음할 경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선뜻 알 수 없다. 동일한 발음이 누이 매(妹), 어두울 미(味), 그리고 아첨할 미(媚)를 모두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발음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서는 글자를 눈으로 확인하여야 하는 것이다. 글자를 볼 수 없을 경우에는 그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해야 한다.

물론 이들 글자들이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다른 글자와 함께 쓰일 경우 뜻이 명확해 지지만, 이 경우에는 굳이 한자의 모양을 확인하지 않아도 뜻이 전달된다. 말하자면 상형문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하여 발음됨으로써 소리문자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한자로 쓰더라도 소리글의 경우는 굳이 글자를 보지 않아도 뜻이 전달된다. 예를 들어 커피를 뜻하는 ‘카페이(咖, 口+非)’ 또는 코가콜라를 뜻하는 ‘커커우커러(可口可樂)’의 경우 글자 모양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오직 그 발음만이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면 이런 현상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 조금 더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말은 말로서 서로 다른 의미를 구별하기 위해 서로 다른 발음을 다르게 조합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하늘과 바다’라고 할 경우, 하늘을 나타내기 위해 ‘하’+‘늘’이라는 두 가지 발음을 사용하게 된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자에서는 하늘은 ‘天’, 바다는 ‘海’로 한 글자로 표시한다. 수 많은 뜻을 글자로 구별하려고 하니 자연 글자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앞의 예문에 나온 ‘백로 로(鷺)’자를 보자. 우리말은 해오라기라고 한다. 그러나 해오라기를 한 글자로 표현하려니까 이렇게 복잡한 글자가 생기게 되었다. 만약에 해오라기를 중국 사람들이 足各鳥로 부르기 시작하였다면, 로(鷺)라는 어려운 글자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어생활에도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 애초부터 이렇게 풀어썼다면 그것은 중국말이 소리말이 되고 한자가 소리글로 바뀌었을 것이다.

한자가 배우기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소리글이었다면 간단한 몇 가지의 글자로 말을 표현할 수가 있었을텐데 뜻글이다 보니 다른 뜻을 가진 글자를 일일이 구별해서 만들었어야 하고 따라서 글자가 익히기 복잡해진 것이다. 민중사관에서 발행한 “한자사전”을 보니 가장 획수가 많은 글자가 ‘절’자인데, 이것은 용 용자(龍)를 네 개나 합한 글자다. 그 뜻은 ‘말 많을 절’자로서 말이 많다는 뜻이다. “말이 많다”고 하면 될 것을, 또는 용자를 네 개를 나열해도 될 것을(龍龍龍龍), 이것을 굳이 한 글자로 만들어 놓으니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글자는 그래도 龍자를 네 개를 겹쳐 놓았으니 익히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산 앵도 나무 울’(鬱)자의 경우 비록 전체 획수는 29개이지만, 한 글자를 쓰기 위해 29획이나 긋는다는 것은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익히기도 어렵다. 이 글자 대신에, 예를 들어 木缶木宀鬯彡으로 풀어썼다면, 같은 획수를 사용하지만 익히기에 더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잡한 글자가 생기기 않고 기초가 되는 몇 가지 단순한 글자로 말을 글로 옮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자는 중국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글자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복잡한 획수를 줄인 소위 간체자를 쓴다. 중국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한자가 전혀 다른 언어에 속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어찌 쉽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직도 한자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경제적 여유를 가진 귀족들만이 배울 수 있었던 한자를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배우기에 어려움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자의 특성과 사회의 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한자는 결코 배우기 쉬운 글자도 아니며 우리 말이 한자가 아니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굳이 한자를 쓸 이유가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한자를 썼기 때문에 과도기적으로 겪는 불편을 다른 방법으로 해소하여야 한다. 바로 꼭 필요한 한자는 괄호 속에 넣어 쓰는 것이다.

[정창인 독립신문 주필]http://blog.chosun.com/cchungc

2009년 4월 1일 수요일

organizational econ - gibbons

TV's new econ

2009년 3월 24일 화요일

0의 0승





어떤 수의 0 제곱은 1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한편으로 0의 거듭제곱은 언제나 0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00의 값은 0일까, 아니면 1일까?


 


 












윈도에 내장되어 있는 계산기(공학용 보기를 이용)를 이용해서 0의 0제곱을 계산해 보면 1을 출력한다. 인터넷에서 계산기 찾아서 이용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그렇다면 00=1일까?


 



 


 


한편, 업무용 프로그램인 엑셀(Excel)에 0의 0제곱을 입력하면 오류 메시지가 출력된다. 수학용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매스매티카(Mathematica)에서도 00을 “Indeterminate(정할 수 없는, 不定)”로 처리한다.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00을 1로 처리하고,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처리할 수 없다고 하니, 심지어 같은 회사가 만든 프로그램에서도!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00을 무엇으로 생각해야 할지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논쟁 및 고민거리의 하나였다.


 


 












“거듭제곱”이란 “거듭하여 자신을 곱한다”는 뜻인데, 세 번 거듭 곱하거나, 스무 번 거듭 곱하는 것은 누구나(?) 무슨 뜻인지 안다. a가 수일 때 a를 n개 곱한 것을 an으로 나타내는데, 지수 n이 자연수일 때는 그 뜻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표기법에 따르면 지수 n이 자연수인 한 당연히 0n=0이다. 그렇다면 지수가 0이나 음수인 경우는 어떻게 될까? a를 0개 곱하거나 -3개 곱하거나 할 수는 없으므로 곧이곧대로는 정의할 수 없다. 따라서 ‘음수끼리 곱하면 양수’라는 설명을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정의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열쇠를 쥔 것은 m과 n이 자연수일 때 성립하는 다음 등식, 즉 ‘지수 법칙’이다.
                                            


이 지수법칙이 음의 지수에 대해서도 성립하도록 a-3같은 것을 정의하려면,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양변을 a5으로 나눠주면, a-3은 a2÷a5 임을 알 수 있다. 이 때 문제가 하나 있는데 양변을 a5으로 나누려면 이 수가 0이 아니어야 한다.


만약 a=0이라면 이런 논법이 통하지 않는다. a가 0이 아닐 때는 다음과 같다.


 



 



이렇게 음수와 0에 대해서도 지수를 정의해 주면 (밑이 0일 때는 제외하고) 고맙게도 지수법칙 am×an=am+n이 여전히 성립한다. 예를 들어, a-3×a-4=a-7임을 확인할 수 있다. 거듭제곱과 지수의 관계에 대한 이상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자연수 n에 대하여 0n=0이고, 0이 아닌 수 a에 대하여 a0=1이지만, 밑과 지수가 모두 0인 00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00은 어떻게 정의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과연 합리적인 정의라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특히 다항식과 관련한 경우, 00을 1로 두면 수식이 간단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다항식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서 x3은 3차항, -5x2은 2차항이다. 7x는 1차항인데, 7x1이라 쓰면 차수를 알 수 있게 해 주므로 일관성이 있다. 남아 있는 상수항 2는 0차항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므로 2x0이라 쓰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따라서 차수를 고려해서 다항식을 표현하면, 아래와 같이 쓸 수 있다.  


 


원래 다항식에 x=0을 대입하면 당연히 값이 2인데, 차수를 밝혀준 식에 대입할 경우 00= 1이어야 양변이 일치한다! 따라서 00= 1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처럼 극한 이론이 발전하면서 00=1로 간주하자는 주장이 크게 공감을 얻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어서, 예를 들어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로 극한 이론을 엄밀하게 정립한 코시(Augustin Cauchy, 1789-1857)는 1821년에 쓴 저서에서 여전히 00은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1830년대에 이탈리아의 수학자 리브리(Gulielmo Libri, 1803-1869)는 00=1을 증명하는 논문을 썼는데 내용이 다소 명확하지 못하여, S라는 서명으로만 알려진 익명의 수학자의 비판을 받았다. 우리에게 “뫼비우스의 띠”로 유명한 독일의 수학자 뫼비우스(F. Möbius, 1790-1868)는 얼마 후 리브리의 주장을 옹호하는 논문을 한 편 발표하였는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가끔 a0=1에 대하여 “거듭제곱은 1에 어떤 수를 곱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지수가 0이면 아무것도 곱하지 않았다는 뜻이므로 그 값은 1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거듭제곱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편일 수는 있겠으나, 엄밀히 말하면 앞뒤가 바뀐 설명이다. 거듭제곱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a0=1이므로 an은 (지수 법칙에 따라) 1에 a를 n번 곱하는 것이다”와 같은 말이다. 즉, a0=1을 가정한 상태에서 하는 설명이므로, 이로부터a0=1이 된다고 말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런 설명을 이용해서 00= 1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수식도 많고, 글도 길어져서 필자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읽기 힘든 분을 위하여 마무리를 겸하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00은 정의하지 않는다. (값을 아직도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2. 그렇지만 ‘주의하여 사용한다면’ 편의상 00= 1로 정의할 수 있다.
3. 위대한 수학자도 실수할 때가 있다.


 


 


글/ 박부성 (경남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


 


[네이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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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 체마

2009년 3월 21일 토요일

화가의 작업

2009년 3월 20일 금요일

지식의 저주

2009년 3월 14일 토요일

2009년 3월 10일 화요일

Problems of Life

2009년 3월 4일 수요일

2009년 2월 28일 토요일

2009년 2월 27일 금요일

commanding heights

1.


2.


3.

2009년 1월 30일 금요일

2009년 1월 24일 토요일

미네르바와 루비니

2009년 1월 23일 금요일

magic incredible

2009년 1월 19일 월요일

why more is less?

richard thaler

Tibetan Book of the Dead

Amit Goswami



toward a spritual econ

spiritual economics



2009년 1월 13일 화요일

티벳 사자의 서

2009년 1월 11일 일요일

2009년 1월 10일 토요일

north korean human rights crisis

inside north korea

a day in north korea






2009년 1월 9일 금요일

국민 경제 스승?

2009년 1월 7일 수요일

유교식 제사 지내기

2009년 1월 1일 목요일

2008, 말, 말,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