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깊은 뜻을!
가능하면 한자어를 쓰지 않으면 우리 말의 발전이 빨라진다?
정창인 자유통일포럼 대표
요즘도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가끔 길을 묻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아직 ‘언문’도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이다. 지하철 길 안내가 한글로 되어 있지만 이들은 그 한글조차 깨치지 못해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쉬운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상당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지 모르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 사람들에게 길을 가리켜주기가 쉽지는 않다. 다행히 지하철 노선마다 다른 색의 띠를 사용해 길 안내를 하고 있기에 어느 색 띠를 따라가면 된다고 일러주지만 아마도 그 사람은 제대로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아직도 몇 사람에게 더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아직도 한문을 쓰고 있다면 아마 국민의 99%가 이 한글도 모르는 지하철 승객과 같으리라. 불편한 점이 단순히 길을 묻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에게 안부를 물을 방도도 없을 것이며 각종 공고문을 읽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뉴스조차 읽지 못할 것이다. 눈은 있으되 글을 읽을 수 없어 눈뜬 장님행세를 해야 할 사람이 국민의 99%가 된다고 가정해보자.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은가.
세종대왕께서 562년 전에 백성이 이런 황당한 일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한글을 창제하셨다. 세종대왕의 뜻은 우리 말이 중국말과 달라 서로 잘 통하지 않으므로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누구나 쉽게 익혀 날로 편하게 쓰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 큰 뜻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상민(常民)이 쉽게 글을 쓰고 읽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던 양반(兩班)들은 한자 사용을 고집하였다. 그래서 구한말까지도 행세께나 한다는 사람들은 한글은 ‘언문’이라고 하여 천대하고 한문을 ‘진문’이라고 하여 굳이 그 어려운 한문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어려운 한문을 아는 것 자체가 지위와 연관된 것으로 여겼다.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상민은 한문을 배울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오직 종을 부리는 양반만이 시간을 들여 한문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한문은 말하자면 일종의 신분 증명서와 같았다.
요즘도 아직 한자(漢字)를 쓰지 않으면 마치 의사전달이 되지 않는 것처럼 또는 글의 품위가 없다거나 지능을 나쁘게 한다는 등의 얼토당토 않은 이유를 내세워 한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배운 사람들 중에서,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중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한자를 익히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없다. 억울하면 배우라는 식이다.
그런데 한자를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자를 좀 안다고 글을 쓸 때에 한자를 섞어 쓴다면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그 글을 읽을 수가 없다. 그 글을 읽을 수 없으니 우리 글이라고 하면서도 우리가 읽지 못하는 글이 되고 만다. 그래도 이들은 한자를 써야 한다고 우긴다. 내가 아는데 너는 왜 모르느냐, 또는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하는 태도다.
한문을 오래 쓴 전통으로 인해 당장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불편한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는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 병기하면 된다. 글 쓰는 사람의 의도가 잘 전달될 뿐만 아니라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그 글을 읽는데 어려움이 없다. 만약 뜻을 모른다면 국어 사전을 찾아보면 된다. 그런데 한자를 섞어 쓰게 되면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옥편부터 찾아야 한다. 그 글을 읽기 위해 한 단계 더 노력해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 쓰기만 하면 쉬울 것을 굳이 옥편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작은 배려조차 거부하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한자를 꼭 섞어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할 때는 왜 한자를 꼭 섞어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된다. 우리 글을 쓰면서 꼭 한자가 필요하다면 말할 때도 꼭 한자를 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말할 때 상형문자의 도움이 없어도 의사전달이 된다면 굳이 글 쓸 때에도 한자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한자를 배우지 않아도 언어생활이 완전할 수 없으며 한자를 사용하여도 완전할 수 없다. 한자를 모르면 한자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으며 한자를 섞어 쓰면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 읽을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한자어를 피하도록 노력하되 꼭 써야 할 경우에는 한자를 괄호 속에 넣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남에 대한 배려다.
가능하면 한자어를 쓰지 않기로 하면 우리 말의 발전이 빨라진다. 한자는 우리 말을 대체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한자는 쓰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 말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된다. 한자 사용으로 인해 죽었던 우리 말도 되살아 날 것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 562돌을 맞아 다시 한번 세종대왕의 높은 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다음의 훈민정음 서문을 우리 말과 한문으로 쓴 것을 비교해보자.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아 아직도 우리가 한문을 써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가.
아직 한글도 깨치지 못해 길을 물어야 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왜 한자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배운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자의 해독능력이 교육 연수와 비례한다면, 한자는 그 자체가 불평등한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등한 사회에서 불평등한 글자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정창인 자유통일포럼 대표: http://unifykorea.net/]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新制二十八字,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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