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7일 목요일

불교의 생명중심적 경제이념 - 진월

불교의 생명중심적 경제 이념 소고
:지속가능한 경제 대안 모색

진 월
URI Korea 대표, 동국대 겸임교수

1. 머리말

새 세기와 새 천년을 맞은 후, 개인이나 크고 작은 단체들 나름대로는 물론 민족과 나아가 세계 인류가 모두 지난 세기 및 천년을 반성하고 문제점을 음미하며 미래의 전망과 아울러 그 대안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여러 가지 주제들 가운데 누구도 무관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경제'인 바, 이는 인간다운 생활의 기본적 조건이며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의의 과제는 지속 가능한 경제의 대안 모색이다. 즉 작금의 경제양태가 환경이나 생태계에 친화적으로 변하지 않을 경우 지구의 미래는 현재 수준으로 지속되기 어렵고 결국 후손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파멸의 불행을 안겨주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금할 수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필자는 그 동안의 무절제한 경제개발의 과정에서 파생된 폐해를 치유하고 생명중심의 지속 가능한 경제 진로를 모색하는데 필요한 지혜의 빛을 불교에서 찾아보려 한다.

그 동안의 경제발전에 대한 사상과 이론 및 그 실행의 결과에 대한 공과가 논의되면서, 빈부의 격차나 자원 고갈의 우려와 아울러 산업사회가 키워온 개발 후유증으로서의 환경오염 및 파괴 등, 그 문제점들은 이른바 지구촌을 포괄하는 총체적 위기의식을 일으키고 있으며, 장래에 인류 및 모든 생명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해결 방안이 새삼 검토되고 있다. 그러한 반성 가운데 특히 기존의 서구적 자연인식과 지배 및 수탈적 경제개발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동양적 자연 이해와 환경 친화적 사상에로의 전환 요청이 생태학적 관점에서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바람직한 미래사회를 예비하는 선구자들은 가장 풍부한 정신적 자원이며 대표적 동양 종교사상인 불교에서 새시대의 가치와 보편적 희망을 찾고 있다. 필자도 건전한 미래사회를 위한 경제이념을 불교적으로 음미하며 그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불교적 경제에 대한 담론은 생소한 듯 보인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종교, 특히 출세간을 연상시키는 불교와 경제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경제는 물질의 생산과 소비 및 그에 따른 개인이나 사회적 관계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며, 불교란 깨우침을 위한 정신적 계발과 실천에 중심을 두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불교인이 경제에 관심을 가지면 불교인답지 않게 느껴지고 경제인이 불교에 신경을 써도 경제인답지 않게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마음과 몸 혹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까닭에 정신과 물질을 떼어놓고 사람을 말할 수 없듯이 불교와 경제도 인간 생활에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음도 분명하다. 다만 불교와 경제가 각각 어떠한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며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관계를 형성 유지하고 있는지가 문제일 것이다. 오히려 불교와 경제가 균형있게 서로 보완해야만 인간다운 경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경제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물질을 생산하고 유통하며 소유하고 소비하는 문화로서 경제인은 경제를 인간 생활의 중심에 두고 경제가치를 인간 행복의 척도로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적 관심은 어떻게 하면 현실적인 삶에 유용한 물건들을 값이 싸게 많이 생산하고 그것들을 잘 유통하며 될 수 있는대로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할 수 있을까에 주목하는 물질 추구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불교는 깨달음을 지향하며 인간 생활의 궁극적 목적에 관심하고 그 의미를 추구하며 현실적인 삶뿐만 아니라 나아가 죽음을 포괄하는 보편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인격전반에 걸쳐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신앙 및 수행 중심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불교적 관심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근시안적 가치보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고 현실적인 욕구를 초월하려는 특성을 보인다. 그러므로 불교인들은 그들의 입장으로부터 경제인들을 물질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이며 상대주의적인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천박한 이들로 폄하하기 쉽고, 반면에 경제인들은 불교인들을 정신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이며 절대주의적인 성스러운 가치를 추구하는 비현실적인 이들로 도외시하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치우친 견해들은 지양되고 보완되어야 한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존재로서 그 생활은 복합적이며 어느 한 측면에 치우쳐 다른 면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는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없다. 오히려 서로의 필요를 인정하고 그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연대하여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확보해야만 건전한 생활을 꾸려 갈 수 있다. 즉 인간생활에서 현실적인 경제문제 해결없이 종교적 이상만을 추구하면 그 자체가 실현불가능한 관념적 모색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반면, "배부른 돼지보다 굶주린 소크라테스"란 말이 상징하듯 경제적인 성취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정신적 특성은 오히려 경제를 넘어서는 데에서 찾아보아야 함이 분명하다. 한 인격체나 사회 공동체에 착실한 경제인적 자질과 동시에 훌륭한 종교인적 소양이 모두 갖추어 지는 것이 바람직스럽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한 방면의 전문성을 서로 존중하며 물질과 정신이 모두 건전하게 확보되도록 진지하게 노력하는 인격형성과 정신문화가 중시되는 건전사회를 이룩하도록 함께 협조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바람직한 경제원리와 그 실천생활에 대하여 불교적 접근을 모색해 본다.


2. 불교의 경제원리

불교는 붓다 즉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뜻하는 바, 대체로 생사의 세계가 고통과 번뇌로 점철되는 윤회의 세계임을 알리며 그 반대로 생사의 고통과 윤회로부터의 해탈 및 열반으로 상징되는 깨침과 기쁨의 세계와 거기에 도달할 방법을 가르친다. 이렇듯 불교는 삶과 죽음은 물론 열반을 동시에 연계하여 문제삼고, 궁극적으로는 깨친 이의 입장에서 그 모든 차별이 초월된 경지인 실상 (實相)의 세계를 제시한다. 그 안에는 뭇생명과 우주의 참 모습에 대한 해명과 아울러 그 제약과 한계의 초월 방법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삶의 영역 안에서 물질적 살림살이에 관한 것인 경제도 총체적인 불교의 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교의 속성상 전통적 문헌 가운데 경제만을 따로 떼어 전반적으로 심도 있게 논의한 체계적 자료는 없는 것 같다. 석존이 출가 수도자 및 재가 신자들의 생활조건에 관련하여 음식, 의복, 주택, 의약 등의 수용을 언급한 대목과 왕을 비롯한 통치자들의 경영방법 등을 교시한 경우는 적지 않게 보이지만 오늘날의 경제적 개념과 같은 구체적 교설은 볼 수 없는 것 같으나 그 내용들을 통하여 충분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불교는 2500여 년 전 인도에서 발생하여 세계적으로 전파되면서 시대상황과 문화양식에 따라 그 뜻이 새롭게 해석되고 변용되어 왔다. 우선 경제의 주체 혹은 실체에 대한 존재론적 불교 인식과 그에 따른 경제행위의 지침을 불교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아야겠다. 불교는 인도의 수풀과 강변을 중심한 아열대기후의 자연환경 속에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일어났으며, 인구의 증가와 도시발전에 따른 상업도 흥성해 가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확산되어 갔다. 그후, 불교는 북방으로 중앙아시아 및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일본에 전해졌으며, 남방으로는 스리랑카와 미얀마, 태국, 월남 등 동남아시아로 퍼졌다. 그러므로 유대교나 이슬람과 같은 척박한 사막지대에서 유목하던 이들의 종교와 다르게 자연과 친화적이었으며 생사관도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불교의 역사적 전개를 돌아보면, 출가 수도자를 중심으로 개인적 해탈의 추구를 우선했던 초기의 전통과 재가 대중의 상황을 배려한 후기의 대승전통으로 대별해 볼 수 있는데, 이들 각각은 사람의 존재 구조를 파악하고 그를 표현함이 다르므로 생사관 (生死觀)과 열반관(涅槃觀)도 다르고, 따라서 삶의 이해와 수도의 방법도 다르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내부의 다양한 부파 혹은 종파에 따라 인간존재와 생활에 대한 인식과 해결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게 표현되었는데 그에 따른 경제 관련부분의 요점과 일반적 특징을 오늘의 우리 입장에서 나름대로 음미해 본다.


1). 초기불교

(1). 경제 주체의 인식

가. 삼법인 (三法印)의 제시

불교의 경제 주체와 대상에 관한 인식을 살펴 보면, 석존의 사상가운데 모든 존재의 특성을 알려 주는 대표적 교설로는 이른바, 세가지 진실의 참모습으로서 '모든 현상은 항상함이 없다 (諸行無常印 Anitya sarva-dharma lakʃaɧa), 모든 것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 (諸法無我印 Niratmana sarva-dharma lakʃaɧa), 번뇌의 불이 꺼지고 나면 고요하고 평안하다 (涅槃寂靜印 Śāntaɣ nirvanam lakʃaɧa)'라고 하는 가르침을 들 수 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사물은 변하며 내것이라고 집착할 것이 없고, 이 이치를 깨달으면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편안하다는 일깨움이다. 즉 모든 미혹의 현상세계는 시간적으로 파악할 경우 모든 사물이 과거 현재 미래의 상황에 따라 일시적이고 유한적으로 변해가며, 공간적으로 보면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여러 조건속에 복합되어져 있으므로 독자적인 자기의 것이 없음을 가르친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들은 그렇게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자기 존재자체도 모르며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다가 결국 환상이 깨어지는 체험을 하면서 괴로움을 느낀다 (一切皆苦). 반면에 깨친이가 지혜로 누리는 본체론적 세계는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한결같이 제한이 없고 집착할 바 없는 광대 자재한 평화와 안정의 상태임을 가리킨다.

이러한 불교의 특성을 생활과 관련시켜 보면, 사람의 생명도 보편적 존재현상의 한 부분이며 전체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의 일부로 파악될 뿐만 아니라, 육신의 사후로도 이어지는 새로운 변화를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현대의 과학적 지식과 정보로도 두루 알려진 바, 물질 구조내부의 끊임없는 소립자의 운동과 세포들의 분열 및 신진대사 등, 물질 현상의 실체가 고정됨이 없이 유동적이며 어느 것도 항상 불변하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로 무상 (Anitya)의 이치를 파악할 수 있고, 아울러 어느 것도 다소간에 여러 요소가 합성된 결과이며 주변 환경과의 계속되는 영향속에 있으므로, '나'라고 하는 독자적인 실체와 '나의' 것이라고 할 절대성을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무아 (Anātman)의 실상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실상을 인식하고 착각과 미망의 한계를 벗어나면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어 걸림이 없이 자유로워질 수 있으므로, 무엇과도 갈등이나 분쟁의 여지와 번뇌가 없는 평온한 열반 (Nirvāɧa) 적멸의 상태가 될 것이 분명하다. 즉 우리의 생명현상을 단기적인 생물학적인 영역의 인식을 넘어 보편적 존재 현상에 대한 총체적 변화의 한부분으로 파악하고, 그러한 현상을 초월한 절대적 종교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고 본다.

이 교설을 경제적인 시각으로 파악해 본다면, '나' 즉, 개인적 경제 주체가 독자적으로 없고, 모든 현상의 부분인 경제 대상도 항상 변하며, 경제적 탐욕이 사라지면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일반 경제인이 듣고는 황당함을 느낄 지 모르겠지만, 그 참 뜻을 음미해 보면 큰 시사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조심하여 생각해야 할 점은 재물은 물론, '나' 혹은 '자기' 존재의 실체를 어떻게 보고 있으며, 경제행위의 계기와 목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등이다. 그러므로 이 교설로부터 이기주의적 혹은 자기중심적 '자아'의 극복이나 소멸을 강조하고, 물질 혹은 자산의 소유와 유지의 한계 및 끊임없는 변동이나 유실의 인식으로 그에 대한 집착을 끊으며, 물질생활의 필요 이상을 욕망함이 불행의 원인이 됨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울러 개인보다 공동체, 축적보다 유통, 물질적 욕망의 추구보다 정신적 자제력에 대한 비중을 느낄 수 있다.


나. 연기법 (緣起法)과 십이인연 (十二因緣)의 시사

연기법 (Pratītyasamutpāda)은 불교의 근본으로서 석존이 깨달음을 성취한 내용이라고 본다.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 (此起故彼起),'는 존재의 참모습을 나타낸 교설로서, 모든 존재의 공간적 시간적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생기지 않으면 저것도 생기지 않는다. 즉 이것이 있기 위하여도 저것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생기기 위해서도 저것이 생겨야 하는 상대적인 존재구조와 조건을 밝혀 상의 상존성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도 절대적으로 자기라고 할 실체가 없으므로 모든 우주의 총체적 존재구조 안에서 파악해야 될 줄 안다.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의 존재가 필요하며 따라서 어떠한 자기 이외의 존재라도 결코 나와 무관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실존적 인간이 조화로운 삶을 꾸려 가려면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만 하는 공존공생의 존재론적 이유와 당위를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일시적이며 독자적이고 개체적인 절대적 생활은 존재할 수 없고 통시적이며 연대적이고 총체적인 연기적 생활관을 보게 된다. 따라서 경제적 존재와 그 실체의 인식도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바, 공동체를 무시한 개인적 경제는 있을 수 없고, 경제적 인간관계를 배타적 경쟁체제가 아닌 공생적 협조체제로 파악하는 유기적 경제관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기론은 인간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연법 가운데 많이 알려진 바, 십이인연설 (Dvādaśāɥgapratītyasamut -pāda)은 보편적 존재의 모습인 연기법을 인간의 실존에 비추어 열두단계로 설명해 보인 것으로서, 지혜로 밝은 상태인 '명(明)'이 홀연이 가리워짐에 따라 어리석음으로 어두운 상태인 '무명 (無明)'에서 비롯하여 윤회의 인생이 전개됨을 가르친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어 죽게되는 중요한 과정을 인과관계로 설명해 주고 있으며 나아가 태어나기 이전의 과정까지 소급해 알려주고 있다. 처음에 진리에 밝지 못함 (①無明 avidyā)으로 말미암아 어리석은 생각과 잘못된 행동 (②行 saɡskāra)을 일으켜 장래의 존재를 유발시킨다. 따라서 인식이 생기고 (③識 vijñāna) 그 대상으로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④名色 nāmarūpa)을 발생시키며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눈, 귀, 코, 혀, 피부, 생각의 여섯기관 (⑤六入 ʃaȭāyatana)을 일으킨다. 이 기관들이 대상들을 접촉하여 (⑥觸 sparśa) 그들의 느낌을 받아 들이고 (⑦受 vedanā), 그 대상을 사랑하며 (⑧愛 tɻʃɧā) 나아가 확보한다 (⑨取 upādāna).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 (⑩有 bhava)이 태어나고 (⑪生 jāti), 그것은 마침내 늙어 죽는다 (⑫老死 jarāmaraɧa). 이 열두 단계를 시간적 인과관계로 나누어 처음의 두 단계 (無明 行)를 과거세의 원인으로, 그 다음의 다섯 단계 (識 名色 六入 觸 受)를 현재에 나타나는 과거의 결과로, 그 다음의 세 단계 (愛 取 有)는 현재의 원인으로, 마지막 두 단계 (生 老死)는 미래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이는 본래 인생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경제도 그 과정의 일부로서 파악해 볼 수도 있겠다. 즉 경제주체 및 대상의 실상을 모르면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그릇되게 전개시켜 그 타성과 체제에 매몰됨으로서 갈증에 소금물을 마시는 것 같은 경제적 악순환의 연속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경제의 실현은 올바른 경제의 실상과 주체의 인식으로 잘못 전개되어 나가는 인연의 고리를 끊고 그 잘못된 원인을 소멸시킴으로서 근본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싣달타는 인생의 궁극적 행복으로서 생사를 포함한 모든 것으로부터 절대자유를 성취하기 위하여 경제적 접근이 아닌 종교적 수행으로 추구하였다. 그 당시에 최선의 방법으로 알려진 요가 수행과 극심한 고행 끝에 그러한 방법으로는 궁극적 해탈을 성취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시도로서 나무아래 앉아 인생의 존재와 고통스러운 삶의 원인을 명상 참구하였다. 그 결과, 모든 존재는 상관된 연기의 결과이며 인생 고통의 원인이 무명에서 비롯되었음을 직시하여 그 무명을 밝힘으로서 성불하고 연쇄적 업연의 고리를 끊어 스스로 해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도 해탈할 수 있도록 깨침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다. 12인연은 사람의 늙고 죽는 고통의 원인을 찾아 없애려는 석존이 사색하고 관찰한 결과를 집약적으로 서술한 것으로서 인간 생명의 출현과 발전 및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보여 준다. 즉 인간 생사의 일정기간에 전개되는 현상적 인과관계의 인식과 아울러, 그 생사가 초월된 본체계로 돌이키게 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일시적 생활의 한계를 극복하는 밝은 길을 보게 한다.

그 당시 인도 종교사회의 두가지 지배적 사상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전통적 브라만교가 주장했던 바, 인간 존재현상은 브라흐만의 변화에 의한 것이라는 이른바 전변설(轉變說)이었고, 다른 하나는 브라만교의를 부정하는 일반 사상계의 것으로서, 인간 존재는 원소들이 모여 이루어졌다는 적취설(積聚說) 이었다. 전자는 경제문제를 포함한 인간생활을 신에 의한 운명론적 결과로 설명하려 했고, 후자는 단순하고 극단적인 유물론적 결과로 해명하려했다. 따라서 브라만 전통은 신에 순종하고 봉사하게 하려는 타율적 생활을 가르쳤으며, 이에 불복하는 세속적 사상들은 쾌락을 추구하며 방종하는 경향이었다. 그러므로 붓다의 연기설은 신과 물질 중심의 극단적 양설의 한계를 극복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의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삶과 사회 윤리적 현실에 합당한 지도이념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불교의 경제원리도 윤리성을 기초로 한 인간중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십이인연으로 예시된 연기설을 통하여 만사의 존재가 인연으로 되어 있으며 본래 비어 있음 (空)을 참모습 (實相)으로 보인다. 스스로 살펴보아도 "나" 라고 할 것이 없으니 (無我) "내 것"이랄 것도 없고 (無所有), 모든 것이 끊임없이 바뀌고 변하므로 (無常), 집착할 것이 없음을 가르친다. 인간 고통의 원이과 존재의 참모습을 모르고 자기를 내세워 이기적 혹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소유할 것 없는 것을 소유하려하며 집착하지 않을 것을 집착하는 어리석음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 어리석음을 깨쳐 고통을 벗어나 일체로부터 자유를 얻고 진리에 따라 사는 기쁨을 누리라고 이끈다. 즉 불교는 고통의 원인이 사물을 인식하고 주체화하는 마음 혹은 정신에 있고 물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 수행자는 고통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서도 지혜를 얻고 욕망을 자재하는 정신 수행을 지향해 왔음을 보여 준다.


(2) 경제 윤리

가.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

석존의 최초 설법인 사성제(Catvāri ārya-satyāni)는 무상과 무아 및 생노병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고통이 끊임없이 따르는 인생의 현상적 진실을 고통이라고 설파하였다 (①苦諦 DuɅkha-ārya-satyāni). 아울러 모든 사태는 그렇게 된 원인이 있으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근원을 추구해 본 결과, 근본적 원인은 무지와 탐욕에서 비롯되는 집착에 있음을 밝혔다 (②集諦 Samudaya- ārya-satyāni). 반면, 깨달음의 지혜로 성취한 열반 즉, 온갖 고통이 사라져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가 있음 (③滅諦 Nirodha-ārya-satyāni)과 거기에 이르르는 길 (④道諦 Mārga-ārya-satyāni)을 밝히고, 구체적으로 여덟 가지의 바른 길 (八正道 Aʃʍa-ārya-mārgani)로써 설명했다. 이는 고통스러운 인생 현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그 원인 분석과 온전한 해결로 고통을 해소하며 궁극적으로 끊임없는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인과연기를 보인 바, 간결 명료한 불교의 기본 교설로서 성스러운 깨우침이라는 뜻으로 성제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고통이나 문제도 원인이 있으며 그 해결을 위해서는 그 원인의 규명과 적절한 처치가 필요하다는 인식론과 방법론이다. 이는 모든 문제의 접근과 해결을 위한 근본으로서 모든 사안을 포괄하는 대안 모색의 기초이다. 따라서 경제적 고통이나 문제도 고제안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인생의 여덟가지 큰 고통 가운데, 나고 늙고 병들어 죽음 (生老病死)의 네가지 큰 고통과 함께 '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 (求不得苦)'도 열거되는 것을 보면, 물질적 경제적 욕구 불만도 어느 인생에서나 보여지는 보편적 문제의 하나인 것이 분명하다. 불교는 어떤 문제현상의 원인을 추구하게 하며 그 해결을 근본적으로 하도룩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면한 경제문제도 이러한 교설로부터 해결의 지혜를 찾아야 될 것이다.

팔정도는 인생의 평안과 해탈에 이르는 바른 길로서, 생활을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적중(的中)하게 하는 바, 올바른 삶의 길이라는 뜻으로 중도(中道)라고도 부른다. 첫째 존재의 연기구조와 사성제를 이해하며 올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는 바른 견해 (①正見 Samyag-dɻʃʍi)를 갖고, 바르게 생각하며 (②正思 Samyak-saɡkalpa), 바르게 말하고 (③正語 Samyag-vac), 바른 행위를 하며 (④正業 Samyak-karmānta), 바른 직업 생활을 하고 (⑤正命 Samyag-ājīva), 바른 노력을 하며 (⑥正精進 Samyag-vyāyāma), 바른 관찰수행을 하고 (⑦正念 Samyak-smɻti), 끝으로 바르게 정신을 집중하여 명상을 하여 (⑧正定 Samyak-samādhi) 열반을 성취하라는 것이다. 정견과 정사는 올바른 인식과 지성적 추구로 삶의 지혜 방면을, 정어와 정업 및 정명은 도덕과 윤리적 삶의 실천 방면을, 정정진과 정념 및 정정은 마음의 계발과 안정 방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는데, 개인의 바람직한 생활과 아울러 다른 이들의 생활 즉 이웃과 사회 공동체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

팔정도 가운데 경제생활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조목으로는, 정업과 정명을 들 수 있다. 정업은 개인과 집단의 경제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으며 그 결과를 모면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다른 이를 자비로움으로 도웁고 자신과 사회를 이롭게 하는 올바른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 정명은 개인의 직업과 생활 방식에 관련하여 다른 이들과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건전한 직업과 올바른 생활을 할 것을 지시한다. 즉 생명을 살상하는 무기나 인신매매, 마약이나 도박업 등 퇴폐적 영업에 종사함을 금지하고 사회에 유익하고 건강한 생업을 권장한다. 이들은 모두 개인과 사회를 연기론적 유기체로 파악하고 대처하는 보편적 윤리사상의 구체적 실현으로 인도한다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건전한 생산과 유통 및 소비를 포함하는 올바른 경제 생활의 지침과 모범을 확보할 수 있다.


나. 업설(業說)의 가르침

업(karma)은 일과 행위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말이지만, 불교안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쓰여져 왔다. 불교에서는 행위를 이해할 때, 신체적 행위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한 언어적 행위도 포함하고, 특히 생각을 통한 의지적 행위를 중시해 왔다. 따라서 신업(身業) 및 구업(口業)과 아울러 의업(意業)을 합쳐 삼업(三業)이라 하여 세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해 왔으며, 신업과 구업에 앞선 의업에 비중을 두었다. 이를테면,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맑게 하며 참선 정진하는 것은 건전한 의업을 계발하는 일이지만, 언행을 올바르게 하는데 필요한 수행으로서 우선적으로 강조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업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아울러, 현상적 인생의 시작과 전개 및 종료 과정, 계속되는 새로운 시작이 모두 업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인식이 연기설과 결합하여 초기 불교 인생관의 기본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불교인들은 금생에 짐승 같은 생각과 행위로 살면 내생에는 그 과보로 짐승이 될 수밖에 없으며 지옥에 가거나 천상에 나는 것도 그와 같아서, 좋은 행위 (善業)는 좋은 결과 (善果) 즉 즐거움 (樂果)을 가져오고, 나쁜 행위 (惡業)는 나쁜 결과 (惡果) 즉 괴로움 (苦果)을 가져와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 업을 지어가기에 달렸다 (自作自受 自業自得)고 믿었다. 즉 불교는 사람의 현생(現生)이 전생(前生)의 업보임과 아울러 내생(來生)의 원인이 됨을 인식하고, 바람직한 미래 삶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자각과 함께 궁극적으로는 업에 의한 윤회로부터 해탈하고자 노력하도록 사람들을 일깨웠다.

업설의 생활관은 업에 따라 목숨이 제한되고, 특정시기의 삶은 죽은 후의 새로운 삶과 이어지게 되어, 열반으로 해탈되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물론 업보는 원인과 상황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시기가 달라, 곧바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참 후에 나타나기도 하여, 살아있을 때 받기도 하고 죽은 후의 다음 생에, 혹은 여러 생을 지나서도 결국은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죄를 지을 경우, 죄값에 따라 벌금을 물거나 곧 감옥에 보내어져 형벌을 받게 되며 심지어는 사형을 당하기도 하지만, 살아서는 알려지지 않다가 죽은 후 알려져 무덤이 파혜쳐지며 시신까지 처벌을 받게되는 역사 기록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좋은 일을 한 경우, 당대에 표창되기도 하고, 나아가 죽은 후에 현창되며 유족이나 자손들에게까지 영예와 보상의 혜택을 누리게 한 경우를 보기도 한다.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등에 의하면, 인간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업의 소산이라고 본다. 개인의 업 (別業 혹은 私業)과 공동체의 업 (共業), 생물들의 세간 (衆生世間)과 생물들이 사는 터전으로서의 세간 (器世間) 등을 통해 모든 것이 업의 결과요, 그 근원은 마음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마음쓰기에 따라 세계를 변화 시켜 나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의 경제현상도 그들의 업이 경제적으로 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 문제점의 시정도 그에 합당한 건전한 업의 수행으로서만 가능하리라는 점과 경제주체의 행동윤리가 기본적으로 중요함을 알려 준다고 볼 수 있다.


다. 계율의 예시

불교의 생활윤리를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구체적으로 보이는 곳은 계율인데, 이는 불교의 이상과 목적 실현을 효과적으로 도웁고 불교인들의 공동체를 바람직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제정된 규범인 바, 경제적 사항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수도자들이 각자의 건강을 온전히 하여야 수도할 수 있으며 다른 이들의 수도를 방해하거나 지장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도 우선 육신의 유지와 보호가 전제됨으로 그를 위한 경제문제도 필수적으로 관련될 수밖에 없다. 원래 개인적이고 자율적인 실천을 강조하고 바람직한 행위 및 좋은 습관으로 안내하려는 계(戒 Śila)와 원만한 공동생활의 유지를 위해 사회적이고 타율적인 규정인 율(律 Vinaya)의 합성으로서의 계율은 출가 수행자와 재가 신도들의 성별 (性別)과 계상 (戒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재가자에겐 계목 (戒目)이 적고 단순하며 포괄적이고 남녀의 구별이 없으나, 출가자에겐 계목이 많고 복잡하며 구체적이고 여성에게는 더 많다. 먼저 재가자들이 받아 지키는 계율을 보면, 5계 (Pañca śila)와 8계 및 10계 (Śikʃāpada)가 있다. 이들 세가지 계율 모두에서 첫 번째는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不殺生)'로서 생명존중사상을 보여주며, 두번째 계목은 '도둑질 하지 말라 (不偸盜)'로서 주지않는 물건을 갖지 못하게 함은 그만큼 경제윤리의 강조와 그 위상을 보여 주고 있다.

출가자의 계목은 미숙한 예비수련자와 성숙한 정식 수도자, 남성과 여성에 따라 숫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근본 내용에는 비슷하다. 초심의 남녀 견습생인 사미 (沙彌 Śrāmaɧera)와 사미니 (沙彌尼 Śrāmaɧerikā)는 함께 10계를 받아 지키는데 첫 번째는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이며 두번째는 '도둑질 하지 말라'이다. 이들은 수행자가 되는데 필요한 기초로서 미리 포괄적인 계율을 제정하여 윤리적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는데 우선의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사분율 (四分律)』에는 성숙한 남성 수도자인 비구 (比丘 Bhikʃu)는 250계를, 성숙한 여성 수도자인 비구니 (比丘尼 Bhikʃuɧī)는 348계를 받는데, 그 첫 번째는 '음행하지 말 것'이고, 두 번째는 '도둑질하지 말 것'이다. 이는 매번 어떤 수도자에 의하여 그 조목의 내용에 관련된 사건이 벌어져 주위에 물의가 생겼을 때마다, 다시는 그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정한 것들로서, 수도자 공동체의 질서와 품위 유지를 배려한 조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계를 받아 지키는 이들의 마음 자세인데, 수계자가 단순히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에 따라 수동적 자세로 훔치고 싶은 의지를 억제해야 하는 타율성이 아니라, 수계자 스스로 그 뜻을 공감 이해하여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겠다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맹서의 다짐이 수계과정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분배와 소유에 있어 탐욕을 억제하고 부정을 계율로써 금지하며, 불교인들은 그를 주체적으로 배우고 익혀서 그들의 삶속에 실현하는 것이다.

2). 대승불교

초기불교 교단이 수 백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출가 수도자 위주로 전통을 유지하려고 사원중심으로 보수화 되었고, 경전과 교리의 해석 및 수행방법의 독선에 따라 여러 부파로 나누어져 갔는데, 그 반동으로 재가 대중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불교 중흥의 사회운동이 일어났으니, 이른바 대승불교를 자임한 이들의 진보적 개혁운동이었다. 그들은 상좌부 (Theravada) 불교를 편협하고 고루하며 개인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소승(小乘 Hinayana)이라 폄하해 부르며 스스로는 중생을 구원하고 불교 본래의 사명을 되살려내는 대승 (大乘 Mahayana)이라 하였다. 소승불교인들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의 발전과 구제를 지향하고 성취한 아라한 (Arhat)이 되는 것인 반면, 대승불교인들의 목표는 중생을 위해 자기 희생과 헌신을 지향하는 보살 (Bodhisattva)의 행업을 통해 성불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경제와 연관시켜 본다면, 소승은 개인중심으로 복리를 추구하는 사유 경제라면, 대승은 대중적 사회복지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경제적 특성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1). 경제 주체 인식

가. 중관론적 접근

중관론 (『中觀論』Madhyamikārikā)은 초기 대승불교의 이론의 정립과 선양에 대표적 인물이었던 용수(龍樹 Nagarjuna)가 공(空 'Sūnya) 사상을 기초로 하여 체계화한 저작으로서, 공을 참(眞)으로 보아 세상의 현상을 거짓 (假, 俗)으로 치부한 두가지 견해 (二諦說)와 그 대립을 극복한 중도(中道)를 가장 바람직한 진리(中道第一義諦)로 주장한다. 주로 반야(Prajñā)계통의 경전류에 근거를 둔 지혜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이 사상 역시 연기설에 근거하고 있다. 대표적 논리로서 이른바, 팔불설(八不說)--생겨남(生), 사라짐(滅), 항상함(常), 끝남(斷), 동일함(一), 다름(異), 감(去), 옴(來)이 없음(不)--을 내세워 모든 존재요소들의 존재론적 비실재를 해명한다. 초기불교도 모든 현상은 변하며 자기 혹은 내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고 하는 무상과 무아를 깨우쳤고 연기와 중도를 가르쳤으나, 중관의 사상은 그 입장과 지향이 다르다. 초기불교의 무아설 (無我說)은 나(我)란 여러 요소들의 집합으로서 그 전체적 실체가 없다고 충분하게 설명해 주었으나 (我空) 그 구성요소 자체는 없다고 하지 않았는데 (法有), 대승은 그 구성요소들 자체를 부정 (法空)하였고, 초기불교의 연기가 업(業)으로 전개된다고 하였는데 (業感緣起說) 대승은 업의 본성도 공하다고 보았다. 초기의 중도설은 극단적인 탐욕적 쾌락이나 금욕적 고행의 양변을 지양하고 수행과 생활의 정도를 깨우친 반면, 대승의 중도설은 존재론적 초월을 보여, 전자가 감성적 접근이라면, 후자는 지성적 이해를 강조함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공사상을 부정을 위한 부정으로만 섣불리 이해하는데, 이는 현상에 집착하는 병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으로서의 특성에만 주목하고 부정의 부정 즉 적극적 긍정의 차원은 돌아보지 못한 소치이다. 아무튼 이 공의 논리는 관계상황을 강조하며 모든 고착과 절대화를 깨트려서 상대화시키며 공안에 모든 것을 평등화시키고 일체에 걸림이 없는 지혜의 자유를 준다.

연기론에 근거한 공사상과 그 위에 건설한 중관학파의 시각으로 오늘의 경제사정을 돌아보면, 세속의 사물에 집착하는 현실주의적 병도 퇴치할 수 있으며 아울러 무상한 현상이라고 세상의 경제를 도외시만 하는 출세간 종교의 이상주의적 치우침도 회향시켜 그 모두를 포괄하고 그 한계 또한 초월할 수 있는 중도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아울러 공의 평등사상은 세상에서의 경제문제 해결에도 크게 시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자본가 혹은 사용자와 노동자를 포함한 피고용자와의 관계를 대등한 관계에서 공생 호혜 하도록 이끌며, 만약 양측의 불화가 발생하더라도 정부나 제3자가 중도로서 중재 조정할 수 있음을 가르친다. 물질의 소유나 사용도 특정인에게만 절대적일 수 없으므로 갖은자나 못 갖은자 누구라도 마음을 비우고 열면 우월감이나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이 상대방을 공평하게 대하여 양측의 협의에서도 고정관념을 넘어 화합의 일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나. 유식론적 접근

중관론을 중심으로 하는 중관학파(中觀學派 Madhyamika)와 더불어 대승의 양대학파의 하나로 알려진 유식학파 (唯識學派 Vijñāptimātravāȭin, Yogācārya)는 무착(無着 Asanga)과 세친(世親 Vasubandhu)에 의해 정립 발전되었는데, 그 기본 사상은 모든 것이 오직 우리의 의식, 혹은 마음뿐이라고 인식이다. 즉 존재는 인식에 의하여 가치와 의미를 갖는데, 그 인식의 주체와 객체는 따로 없이 오직 의식(唯識)이나 마음(唯心)일 뿐이라는 말이다. 유식학파는 인식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외부세계가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며, 이 우주는 오직 인식하는 이의 마음속에 있다고 설한다. 유식은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전제로 하여 확립되었는데, 중관이 오직 공만을 주장함에 만족치 않고 그 공을 깨닫는 것을 유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 식심의 근거로서 장식(藏識 Alaya-vijñāna)을 제시한다. 이는 인류의 보편적 의식과 아울러 개인의 특성을 어우른 바, 한없는 시간에 걸친 우리들의 인식과 인상의 저장고로서 모든 생각과 느낌이 이곳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식을 정화하고 계발함에 따라 무한한 지혜와 잠재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아가 이세상의 변화와 건설의 주체는 우리 의식이란 점을 일깨운다. 인간의 정신성과 지성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체계로서 인생과 우주의 창조와 변화의 주체가 우리들에게 달렸다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유식론적 시각으로 경제를 본다면, 우리는 외부 세계의 경제적 상황전개도 우리의 책임임을 알게 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경제적 세계의 창조와 유지 및 진행도 다름 아닌 우리들 의식의 발현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한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떤 경제적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남에게 돌리거나 원망하지 않으며,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그 문제의 원인을 반성하며 그 해결을 위하여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대안 모색과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의식의 개성이나 특수성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동질성과 보편성도 자신의 의식을 통하여 이해 공감할 수 있어 경제행위에서도 남을 무시하거나 속이려 들지 않을 줄 안다. 물질적 문제도 의식이 주도하여 문제해결의 방향과 방법을 잘 선택하고 결정하며 적절히 조정하여 인간 중심적 복지사회를 건설해 나갈 수 있겠다. 물론 그러한 바람직한 경제의 모색은 개인과 그 공동체가 모두 유식관을 수행하여 심식을 가다듬고 그 지혜를 공유하며 한마음으로 협조할 때 가능할 줄 안다.


다. 화엄과 열반 및 정토계 사상적 접근

『화엄경』 (華嚴經 Avatamsakasutra)의 잘 알려진 특성으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에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는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 강조와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一切唯心造)'라는 유심사상 및 잡화엄식 (雜花 嚴飾)의 화엄회상 즉 '여러 가지 꽃과 나무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정원'의 다양성과 통일성 혹은 보편성과 특수성 등에 대한 교설이다. 『열반경』(涅槃經 Mahaparinirvanasutra)은 소승에도 같은 이름의 경이 있으나 거기서는 석존의 입멸 사건을 서술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으나 대승에서는 그 사건의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강조한데 차이가 있다. 대표적 주제의 하나는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선포이다. 『아미타경』(阿彌陀經 Sukhāvatīvyūha)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 장엄이 보배롭고 아름다우며 모두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만든 바로서, 그 안에는 새들조차 아미타불의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변신임을 보여 준다. 즉 자연환경과 생명도 일체임을 가르친다.

이들 대표적 대승경전의 사상들을 통해 현실의 경제를 보면, 사람마다 각자가 모두 평등하게 고귀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각자의 개성과 역할이 존중되고 다양성이 필요한 즉, 모든 경제주체가 동등하게 인정되며 모든 직업이 귀천 없이 필요성을 평가받는다. 개인마다 이상적 인격실현을 위하여 무한히 향상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평등하게 온전히 갖추고 있으며, 자연환경도 부처와 같이 존중하여야 된다. 따라서 경제는 이러한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 갈 수 있도록 조성되어야 하며, 자연환경도 정복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와 경외의 존재로 대하여야 된다. 오늘의의 우리사회 경제현실에서 노(勞)ㆍ사(使)ㆍ정(政) 등 모든 경제주체의 평등한 입장존중과 다양한 직업의 육성, 환경보호와 인간성이 발현되는 균형있는 경제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이상사회를 이루어 가는 길임을 알 수 있다.


(2) 경제윤리

가. 보살행 육바라밀의 가르침

보살의 수행은 깨달음을 지향하되 자신과 남을 함께 이롭도록 한다 (自利 利他). 소승이 자기중심적이라서 남을 소홀히 한다면, 대승은 남을 우선하며 자기를 희생하려는 고귀한 서원을 지킨다. 중생이 모두 성불해 마칠 때까지 자기의 성불을 미룬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이나, 중생계가 끝날 때까지 중생을 위한 열 가지 서원을 끊임없이 지켜나가겠다는 보현보살의 발원은 대승보살의 모범이 된다. 대승적 수행의 보편적 덕목으로 이른바, 육바라밀이 있다. 바라밀(波羅密 Pāramitā)이란 깨달음의 피안에 도달함 (到彼岸), 혹은 지혜의 완성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 여러 가지 덕목이 있을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보시(布施 Dāna), 지계(持戒 'Sīla), 인욕(忍辱 Kʃānti), 정진(精進 Vīrya), 선정(禪定 Dhyāna), 지혜(智慧 Prajñā)의 여섯 가지를 차례로 꼽고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덕목인 보시는 남을 위해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하며, 물질적 베품 (財施)은 물론, 정신적인 베품 (法施)과 두려움을 없애주는 감성적 베품 (無畏施)도 포함한다. 두 번째 덕목인 지계는 계율, 즉 건전한 생활 윤리를 지켜 나감을 가리키는 바,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일을 할 뿐 아니라, 욕망을 절제하고 순박하게 사는 것이다. 세 번째의 덕목인 인욕은 어려움을 참아내는 것으로서 남으로부터의 부당한 모욕 등을 참을 뿐만 아니라 불편함도 참아 낼 수 있어야 한다. 나머지 정진과 선정의 수행 및 그 결과와 같은 지혜의 완성은 정신적 측면의 수행이다. 이 모든 것은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누구나 수행해야 할 현실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보편적 수행 요목이다.

육바라밀을 경제에 적용해 말한다면, 보시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들을 이웃과 나누는 수행으로서, 소유와 분배의 경제정의를 자비로서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나눔도 포함된다. 지계는 물질적 탐욕심을 절제하여 사치와 낭비를 줄이고 검소하게 살며, 정직한 수입과 공정한 거래로서 남의 것을 강탈 착취하거나 도둑질하지 않으며 분배도 타당하게 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경제적 정의와 질서를 지킴을 들 수 있겠다. 인욕은 어려운 경제사정을 적절히 참아내며 괴로움을 당하여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내핍생활과 협상에 있어 타협을 추구하는 생활 자세를 말할 수 있다. 정진은 생산과 유통 등의 경제활동에 있어 효율성을 연구하며 근면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함을 들 수 있겠고, 선정은 경제적 혼란을 질서 있게 바로 잡고 들뜬 소유나 소비성향을 안정시키며 문제의 원인과 경과 등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함을 말할 수 있으며, 지혜는 건전한 경영과 경제 생활을 위한 올바른 자료와 방법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슬기로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나. 대승계

대승계는 소승계보다 포괄적이며 자신의 수행을 위해서는 물론 이웃과 나아가 중생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생활 방식이다. 자신을 다스리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절제하는 소승류의 계율을 포함하며 남을 위해 착하고 좋은 일을 하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활방식을 권장하고, 나아가 모든 중생을 보살피고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른바, 삼취정계(三聚淨戒)를 권장한다. 계율의 조목도 구체적인 사건위주의 서술보다 원리를 제시하여 윤리정신을 북돋우고 결과보다 동기의 중요성과 자발성을 강조한다. 대승전통의 대표적인 계율로서 『범망경 (梵網經)』에 기초한 열 가지 기본이 되는 것과 마흔 여덟 가지 세목을 들 수 있는데 (10重 48輕戒), 첫 번째가 남을 해치지 말며, 두 번째가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말고, 세 번째가 불건전한 성생활을 말며, 네 번째가 거짓말을 말고, 다섯 번째가 정신을 흐리게 하는 마약성 물질을 삼가라는 등 건전한 생활 방식을 제시한다. 대승정신은 잘못될 것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그 반대로 바람직한 선행을 장려한다. 이를테면, 남을 해치지 않음에 그치지 말고 남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잘 살도록 도웁고, 도둑질하지 않음에 만족하지 말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남과 함께 나누며, 건전한 성생활을 하고, 진실을 말하며, 남을 마약으로부터 보호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돕는다.

대승계율정신을 경제에 결부시켜 보면, 경제적 폭력과 부정부패 방지 및 불공정 행위 금지 등을 들 수 있고, 나아가 분배정의와 자선사업 권장 및 복지사회 건설을 조장한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영리를 위하여 남을 파멸시키거나 남의 재물과 노력을 절취하고 사용한 노동에 합당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거나 음란 매춘 등 퇴폐영업, 마약이나 무기 등의 밀수, 탈세, 사기, 횡령, 등 사회에 불건전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방종한 생활을 하는 것을 경계하고 방지한다. 나아가, 빈궁한 이들을 도웁고, 노약자나 부녀자들을 보호하며, 착취와 억압을 받는 노동자와 고용자들을 정당히 대우하도록 계도하고, 유통과 분배가 잘 되도록 독려하며 불정 부패와 불공정거래를 고발하고 시정토록 요구하는 일 등, 건전한 사회경제확립과 복지실현이 모두 대승적 계율정신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대승불교적 계율정신의 동아시아적 토착화와 상황적 변용의 하나로 선종(禪宗)의 청규(淸規)가 있는데, 이는 선수행자들이 일정한 지역에 공동체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생활하며 수행의 효율과 경제적 자립을 추구한 결과로서 집단노동과 역할분담으로 재물의 공동생산과 사용 및 검소하고 질박한 내핍생활을 강조한 것이다. 잘 알려진 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백장 선사의 말씀은 일상생활 가운데 인간의 존재방식과 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운 명언으로서, 수행자가 신도들로부터 물자의 제공만 받고 안일하게 지내는 듯한 편견을 극복하는 본보기가 되어 왔다. 결국 정신 수행을 농림경제생활과 일치시켜 노동을 단순한 물질적 생산개념을 초월한 종교적 수행의 당위로 승화시켰으며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기보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소비하며 수도에 전념하려고 노력한 환경친화적 경제생활의 선례로 볼 수 있다.


3. 불교 경제 이념의 현대적 전개

앞에서 살펴 본 불교의 경제정신은 지역문화 환경과 시대에 따라 출가 수도자는 물론 재가 불교도들과 나아가 일반인들의 생활속에 유지되어 왔다. 여기서는 오늘날 그 정신을 주어진 상황에서 주체적으로 펼쳐 나감으로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그 장점을 알아본다.


1).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Sarvodaya Shramadana)"의 말은 범어로서 그 뜻은 "모든 이들의 복지 (사르보다야)를 위한 힘의 나눔 (슈라마다나)"이다. 이 운동은 스리랑카의 불교인 아리야라트네 (A.T. Ariyaratne) 박사가 불교의 자비 (loving kindness)와 관용정신을 바탕으로 1958년 지방의 몇몇 고등학생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시작한 이래, 지금은 1만1천여 부락에 걸쳐 6백만명이 넘는 인원이 동참하는 바, 민중계몽과 지역개발을 위한 민간인 공동체사업이다. 전 스리랑카 인구의 절반 가량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이 운동은 그 이념과 방법이 건전하고 성공적이므로 현재 미국을 포함하여 15개국에 지부가 형성되어 가며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의 새마을운동이 군사정부에 의해 주도된 것과 비교하면 사르보다야 운동은 간디의 사상과 같은 자생적 민간운동으로서 단순한 경제개발운동의 차원을 넘어 민중의 각성과 고양을 위한 정신 교육 및 사회 문화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의 연기론적 사상으로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돕고 살아가는 공생공영의 분위기는 시골의 촌락을 중심으로 지방분권적 자조 자립을 도모한다. 이 운동은 농업의 협동개량사업을 포함하여 풍력과 쓰레기 처리로부터 나오는 메탄가스 등을 이용한 환경친화 공법 개발 등 자원절약과 환경보호를 감안한 소규모 협동노력으로 자발적인 호응 속에 지속적인 발전을 해 오고 있다. 사르보다야 조직이 건설한 지역의 도로량이 정부가 한 것보다 사뭇 많다는 점이 보여주듯 민간 단체의 자생적 자조사업이 얼마나 착실하게 진행될 수 있나에 좋은 참고가 된다. 잡다하게 이와 유사한 운동들이 일시적인 전시 효과를 노리는 정치 사회적 현상으로 명멸하는 경우들이 많아 왔는데 사르보다야처럼 지속적으로 민중 속에 번져가기는 드문 일이다. 이 운동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정신성의 강조로서, 모든 참가자들이 매일 한 두 차례 동시에 '자비'에 대한 명상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경제적 복지는 물론 정신적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 대만의 <자제(慈濟)>운동

'자제'는 불교의 자비정신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으로서 대만의 셍옌 (澄嚴) 비구니 스님이 30여 년 전부터 전개해 온 운동이다. 그녀는 1966년 재단을 설립하고 빈민구제 등 자선사업을 포함하여 병원과 학교를 만들고 의료, 교육, 문화, 환경보호 및 공동체 봉사활동을 해 오고 있으며, 미국 등 20여 개국에 지부를 두고 있다. 자선단체로서는 대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이 조직은 그간 수백만의 회원들이 열성적으로 동참하여 대만내의 구제사업은 물론 재난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 본토인들에게도 막대한 지원을 하여왔다. 최근 대만에 지진사태가 났을 때도 정부가 구제를 착수하기 전에 먼저 민활하게 구조를 시작하여 해당지역 주민들의 칭송을 들은 활동사례가 보여 주듯 방대한 자원봉사조직과 성금조달 방법 등은 놀랄 만 하다. 아무튼 불교의 민중구제를 서원한 보살행으로 자비의 사회적 실현에 모범이 되고 있는 바, 여기서도 경제적 뒷받침이 튼튼해야 그 뜻을 이룰 수 있음과 아울러 민중의 자발적 동참이 필 수적임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3). 서구의 불교경제사상 연구

근래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경제계에 관심을 일으키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특히 한국에서 소수의 큰 재벌들이 경제계를 주도하고 지배해 온듯한 파행성을 감안할 때, 중소기업의 육성이 요청되고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에 있어서나 국가 사회경제의 균형잡힌 발전을 위해서나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주제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같은 이름의 책제목으로서,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가 지은 Small is Beautiful--A Study of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 즉 불교적 인간중심 경제학서의 번역어인데 서구인들에게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 후, 우리 사회에서도 읽혀지고 알려진 경제사상서를 가리킨다. 독일에서 태어난 슈마허는 영국 미국 등지에서 슘페터, 케인즈, 윌리스 등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로부터 경제학을 배운 후, 독자적 경제 이론과 실천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남미 등 이른바 제삼세계의 경제개발에 기여했던 탁월한 인물이다. 1973년에 출판된 위의 책은 현대공업문명을 근저에서부터 비판하고 있는데, 유한한 자원의 무절제한 사용, 기계와 기술 만능적 사고, 물량위주의 대규모 조직 선호 등, 성장과 개발만을 추구하며 돌진한 경제일변도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인간과 환경을 중심으로 하는 건전한 문화사회로의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슈마허는 1970년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경제에 충격을 준 석유위기를 10여 년 전에 경고했으며, 1990년대에 세계적 이슈로 부각된 환경문제 등을 예견한 통찰력 있는 경제사상가였다. 그는 불교를 연구했고, 건전한 삶의 방식으로 팔정도에 주목하여, 근대문명이 유물주의 경제학으로 욕망을 조장시키는 반면, 불교는 그 욕망을 조절하며 인간성을 순화시키는 중도사상으로 균형 잡힌 경제생활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불교경제학을 현대의 물량위주적 경제 병통을 치유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야말로 서구 경제학의 한계와 병폐를 통찰하고 동양사상, 특히 불교의 지혜를 통하여 그 극복의 가능성을 보임으로써 경제학계는 물론, 인간성 회복과 생태계 파괴의 치유를 모색하는 문화 사상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어 오고 있는 현대판 불교 경제학서이다.


4. 맺는 말

앞에서 살펴본 불교적 열린 경제관으로 현대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 동안의 경제시책에 따른 시행착오를 성찰하고 빈부격차와 분배의 불평등이 자행되는 자본주의나 개성과 창의성을 무시하는 사회주의를 고집 고착하여 어느 한쪽의 체제 일색으로 치우치기보다, 중도적 사상으로서 사회적 자본주의 혹은 수정자본주의나 개량사회주의 등 어떻게 표현될지라도 그 내용은 보편적 생명존중의 기저 위에 더불어 살아가려는 연기론적 자각으로 모두를 위하여 융통성 있게 의미있는 경제생활을 꾸려나가야겠다.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하는 경직된 체제의 틀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으로서의 중도 정신은 무제한적 욕망성취의 쾌락주의나 불편 부당한 내핍과 통제에 의한 금욕주의의 양극을 지양하고, 필요한 만큼 누릴 뿐 낭비와 방종을 절제하는 인간과 문화중심의 건전한 경제생활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한과 북한이 강점들을 서로 나누고 보완하여 조화롭고 균형있는 번영을 확보해야 할 줄 안다. 중도정신은 물질과 정신세계간의 관계에도 필요하다. 경제가 경제만을 위한 메카니즘을 통한 물질적 타성에 끌려 갈 때 인간성의 소외와 상실이 초래됨을 깨닫고, 경제의 목적이 인간생활의 의미와 가치의 실현을 위한 과정과 방법으로서의 역할임을 인식하여 목적의식과 방향감각을 되살려 경제의 수단에 매몰됨을 경계하여야 한다.

불교가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조화와 일치를 강조함을 볼 때, 만약 세계 각 지역의 특성에 따른 소규모 자율경제단위를 육성하고 연계시키면, 이는 그 동안의 서구식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행태로 자연파괴와 다국적 대기업의 경제 제국주의적 압력에 타율적으로 말려들던 과도한 산업시대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긍정적 대안이 될 수 있다. 통제된 획일성을 지양하며 자율적 다양성을 보호하고 조장하는 중소규모의 지역경제체제가 바람직할 줄 안다. 정원에 모양과 빛깔 및 향기가 다른 꽃과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야 아름다움을 이루어 낼 수 있듯이 다양한 규모와 특성의 지역자치 공동체가 주체적 경제기획 및 문화활동을 하도록 권장할 필요가 있다. 자기의 이익뿐만 아니라 이웃의 이익도 함께 생각하고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대승정신으로 나누고 베푸는 복지사회를 실현해 나가야겠다. 자기가 향유하는 경제적 기쁨을 이웃과 나누려 하고 이웃의 빈곤과 고통도 자기가 스스로 분담하려는 동체대비의 정신이 필요하다.

자연환경과 사회도 우리들 공동업의 결과이며 우리의 의지적 노력으로 기존의 병폐를 치유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불교의 교설은 현재 우리가 느끼는 경제적 문제들을 주체적으로 풀어 나갈 수 있는 희망과 책임감을 일깨운다. 현재 상황이 과거 행업의 결과로 인식한다면 그 원인을 점검 통찰하여 그 병폐가 미래에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며,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좌절할 필요 없이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줄 안다. 더 이상의 환경오염과 파괴를 막고 적절한 정화계획을 세우며 물질주의와 이기적 소유 및 소비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중심주의와 나눔 및 탐욕의 절제와 순화를 지향하는 대승불교사상을 일깨우며 생활화하도록 한다면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고 생명공동사회 건설도 자연스럽게 실현될 줄 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들 마음먹기에 달렸다. 모두 공감하고 합심하면 생명중심의 경제와 종교생활을 통해 지속 가능한 건전 지구화를 마침내 이루어 낼 줄 안다.






<참고자료>


宮坂有勝. 편집부 옮김. 『불교에서 본 경제사상』. 서울: 도서출판 여래, 1991.


大野信三. 박경준ㆍ이영근 옮김. 『불교사회경제학』. 서울: 불교시대사, 1994.


Schumacher, E. F. 김진욱 옮김. 『작은 것이 아름답다』. 서울: 범우사, 1995.


Badiner, Allan ed. Dharma Gaia. Berkeley CA: Parallax Press, 1990.


Gernet, Jacques. Franciscus Verellen trans. Buddhism in Chinese

Society: an Economic History from the Fifth to the Tenth

Centuries. New York:Columbia University Press, 1995.


Jha, Hari Bansh. Buddhist Economics and the Modern World. Kathmandu: Dharmakirti Baudha Adhyayan Gosthi, 1979.


Kotler, Arnold ed. Engaged Buddhist. Berkeley CA: Parallax Press, 1996.


Payutto, P. A. Buddhist Economics, a Middle Way for the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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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ts, Jonathan, Alan Senauke and Santikaro Bhikkhu ed. Entering

the Realm of Reality: Towards Dharmic Societies. Bangkok: Suksit Siam, 1997.



<필자 프로필>



성명: 이 영호 (李 英浩 Lee, Young Ho) 법명: 도원(道元)

법호: 진월(眞月)


1968년 해인사 입산.

1974년 해인승가대학 대교과 졸업.

1974년 겨울 통도사 극락암에서 수선안거이후, 조계총림 수선사, 비슬산 도성암,사불산 대승사 등지에서 6년 동안 안거.정진.

1984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 졸업 (문학사).

1986년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종교학과 졸업 (문학사).

1890년 하와이 주립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문학석사).

1998년 쓉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대학원 불교학그룹 졸업 (불교학 박사).

한국종교연합선도기구(URI Korea) 대표.

불교-기독교 학회(SBCS) 국제자문위원.

대한불교조계종 국제교류위원회 부위원장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초의(艸衣)의 선(禪)사상과 특징"『韓國宗敎硏究』서울: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2000.

"한 불교인의 종교간 대화 체험과 그 전망" 『열린 종교와 평화 공동체』. 서울: 대화출판사, 2000.

"불교의 생명사상" 『생명과 더불어 철학하기』. 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0.

"21세기 사회의 宗敎多元主義的 시각으로 본 元曉의 和諍-饒益衆生 思想과 삶: 世界宗敎聯合先導 (URI) 運動의 地平에서" 『원효전집』 II. 서울:불교춘추사, 2000.

"Ch'oŭi Ŭisun 艸衣 意恂 (1786-1866): A Liberal Sŏn 禪 Master and an

Engaged Artist in Late Chosŏn 朝鮮 Korea."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1998.

"A Mahayana Vision of Dharmic Society in Korea" in Entering the Realm of Reality: Towards Dharmic Societies. Bangkok: Suksit Siam, 1997.

"The Ideal Mirror of the Three Religions (Samga kwigam)of Hyujŏng" in Buddhist-Christian Studie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5.

"Dealing with Death in the Korean Buddhist Tradition" and "Buddhist Funeral and Memorial Ceremonies in Korea" in Living and Dying in

Buddhist Culture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1993.

"Buddhism" in Sourcebook of Korean Civilization vol. I.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Samga Kwigam of Hyujŏng and the Three Religions" in Buddhist-Christian

Studie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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