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8일 금요일

언어와 실재 - 지장 스님

언어와 실재

한 달에 한번 나는 김천 직지사로 충전여행을 떠난다. 말로는 사람들과 몸과 마음의 휴식이나 평온을 위해 명상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업이 되다보니 휴식을 가르치다 지치는 꼴이 되어 버린다.

나도 나만의 휴식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쉰다고 휴식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직지사에서 매월 한 번씩 차명상 템플스테이를 진행하는데 이 때는 이론 강의가 거의 없고 이틀 동안 명상하고 쉬고 또 명상하고 쉬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이론 강의가 없는 까닭에 복잡하게 머리 쓸 일도 없고 그냥 되는대로 숲 속의 바람 소리, 깨끗한 공기에 내 자신을 내 맡길 뿐이다.

생각을 안 하려 하면 너무나 피곤하다. 생각은 거의 대부분 스스로 발생하지 내가 일부러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내가 일으키지 않은 생각을 막아보려 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휴식을 위해 명상할 때는 생각을 기다린다. 어떤 생각들이 올라오는지 정신 차려 기다린다. 나는 명상하면서 꼭 필기도구를 옆에 둔다. 왜냐하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생각들 중에 하루 한 개 꼴로 정말로 귀중한 것들을 얻어내기 때문이다.

명상하면서 일종의 생각의 낚시질을 한다고 할까? 일부러 생각하면 안 일어나는데 그냥 내버려 두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찾아온 귀한 생각들은 명상이 끝나면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명상 중간에 아쉽지만은 얼른 메모를 해두어야 한다.

여러 사람들과 같이 명상할 때는 명상이 끝나고 꼭 물어본다.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러면 처음 명상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왜 이렇게 명상이 어렵느냐고 물어본다. 다리도 아프고 졸리고 또 왜 이렇게 많은 생각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축하한다고 말한다. 너무나 명상을 잘했다고 오히려 칭찬해준다. 당사자는 나의 표현에 의아해 한다. 아니 명상이 잘 안되어서 힘들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자신을 사실적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로 명상을 잘했다고 말해준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상을 하면 자신을 잊어버리고 평온함이나 특정 생각에 잘 몰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을 잊고 있었다면 이것은 자신을 떠나 있던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오락이나 드라마 같은 대상에 잠시 자신을 잊고 있었던 것과 결과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명상은 알고 보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자신을 잊어버려 행복해 지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자신을 잘 알고 이해해서 행복해 지는 방법이다. 자신을 잊어버리고 어떤 대상에 마음을 몰두시키면 그 순간에는 오직 그 대상만이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몰입의 황홀을 맛보게 된다. 이 방법은 우리에게 많이 익숙한 방법이기도 하고 흔히 명상은 이런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몰입되어 있는 동안만 편안함을 느끼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그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에 대한 이해가 생기지는 않는다.

다른 방법으로는 자신을 사실적으로 잘 알고 이해해서 근본적으로 마음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방법이 있다. 원래 명상은 자신을 사실적으로 알고 몰랐던 사실을 알아서 그만큼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평온하게 하기보다는 이해를 통해 근본적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래서 일단은 사실적으로 현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현재 사실적인 자신의 모습은 잘 알고 보면 그리 기다려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거의가 답답하고 들떠 있거나 불만족한 느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려고 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잘 잊도록 해주는 것을 더 찾아다닌다.

어찌되었건 처음 자신을 사실적으로 알고 있으면 불편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나의 사실적인 모습을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우리는 몰랐던 ‘나’에 대해서 이해해 간다. 그리고 그런 이해들을 바탕으로 조금씩 마음이 여유로워 진다.

사실적으로 나를 보면서 처음 깨닫게 되는 사실 중에 하나가 우리는 언어라는 세상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보는 힘이 강해지면 더욱 집중적으로 그리고 더욱 오래 자신을 관찰하게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실재와 이름 혹은 실재와 관념을 구별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있는 그대로’와 ‘언어의 해석을 거친 인식’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또 머리로 생각하며 산다. 그런데 몇 몇 순간들을 빼고는 거의 자동적으로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안다. 지금 당장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 아마 자신이 모르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름을 알 수도 있고 이름을 모를 경우는 어떤 특성으로 그 대상을 안다. 아무튼 현재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일단 언어를 통해 아는 것이다.

항상 그래왔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추하는 것도 다시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더 뜨거워 질 수도 있다. 항상 숨을 쉬지만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듯이 언어라는 기반을 통해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서 이다.

언어의 해석을 거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실재’라고 부른다. 이 실재는 무슨 고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그 자체이다. 그리고 하루 중에 때때로 우리는 언어의 터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이 실재를 바로 알고 경험하기도 한다.

우리는 편의상 실재에 이름을 붙인다. 이것이 언어인 것이다. 실재에 이름이 붙어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는 실재를 그 이름으로 인식한다. 실재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살아가기 위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실재에 이름을 붙이다 보면 그 이름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할 수 없고 또 이름과 함께 고정된 시각을 갖게 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고 말할 때 사람은 동물이나 식물과 다른 살아 있는 어떤 생물체를 말한다. 그런데 사람 중 에는 여러 인종과 남, 여, 나이의 차이 등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같지는 않지만 사람이라고 표현할 때 그냥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고유의 이지지나 어떤 감정을 함께 떠올린다.

실재에 이름을 붙이면 그 실제는 관념이 된다. 그리고 관념은 생각 속에서만 실재하는 것이 된다. 관념은 일종의 가상 세계 임 셈이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평소 실재와 이 실재에 이름 붙인 관념과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굳이 구별하고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살긴 하지만 일종의 가상 세계에 산다고 할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영화 ‘메트릭스’를 떠올릴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참 기발하고 대단한 상상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명상을 하다보면 실제로 우리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다시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자신을 진짜로 잘 알게 되면 실재와 관념을 구별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관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닌 인위적이고 편협 화된 것이기에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름을 붙이기 전 실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 상태 또한 고차원적이거나 도달하기 힘든 상태가 아니라 그냥 알아지는 그대로 또는 느껴지는 그대로 아는 것뿐이다. 단지 이름을 붙이지 않고 또 생각으로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세상에서는 특히 ‘나’에 대해 이러 저러한 견해를 가지게 된다. 무언가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좋고 나쁨이 있고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시비분별의 어떤 선이 그어지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기가 막히게 좋은 생각이라 해도 엄밀히 따지면 우리 인간의 뇌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또한 말로 표현된 것들은 실재를 다 표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좋고 나쁨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여러 차원의 사연을 포함하고 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좋은 말이 될 수도 있고 또 나쁜 말이 되기도 하며 그 이면에 그 말이 사용되기 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사연과 상황이 얽혀 있다는 것이다.

실재 차원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있으면 언어라는 것을 통해 얼마나 우리가 규정되어 지고 사고의 제한을 받게 되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갈등과 대립, 고통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실재 차원에서 보면 모든 존재들이 최선을 다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포장에 현혹되어 그 사실을 잘못 인식 할 뿐이다.

우리는 결코 언어의 감옥을 벗어나 살 수는 없다. 그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평화를 만드는 언어는 칭찬의 말이라고 한다. 우리는 칭찬을 통해 언어 이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장점을 찾아보고 아름다운 말로 표현해 보자. 바로 거기에서 언어와 실재의 구별이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말과 글 기고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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