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3일 일요일

깽판 쳐야 들어 주는 정부

[문갑식]'깽판'쳐야 들어주는 정부


17일 밤 휴대전화가 울렸다. 한국노총 김성태(金星泰) 사무총장이었다. 안부 인사 나눌 겨를도 없이 그가 외쳤다. “문형, 청와대가 이래도 되는 거요. 우리를 막판까지 몰고 가네. 본때를 보여 줄 거야.” 이 말을 끝으로 뚝 끊긴 그의 음성이 남긴 여운은 한참을 갔다.
18일 아침 8시20분, 기자는 노총 강훈중(姜勳中) 홍보국장의 전화를 받았다. 웅웅거리는 소음 사이로 그도 소리쳤다. “문형, 오전 9시부터 조흥은행 파업 들어갑니다.”전화는 또 끊겼다. 불과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우려했던 대로 조흥은행 노조는 이날 아침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예정보다 1주일을 앞당긴 전격적인 집단행동이었다. 이에 앞서 지난 16일, 조흥은행 노조원들은 청와대에 무더기 사퇴서 전달을 시도했고 17일 오후에는 삭발식도 벌였다.

조흥은행이라는 뇌관(雷管)의 폭발은 머지않아 관련 은행의 동조 파업을 부를 것이고, 이는 다시 노총 산하 영세 기업들의‘2차 폭발’로 이어질 것이다. 기자는 이 시점에서 올해 초‘온건하고 합리적인 노동운동의 모습을 보이겠다’던 한국노총의 다짐을 떠올렸다.

노총 이남순(李南淳) 위원장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취임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이제 노동운동도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격하고 폭력적인 노동운동은 더 이상 사용자와 노동자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어렵지만 해보겠다”고도 했다.

1개월 전 다시 이 위원장을 만났을 때 그의 말과 표정은 바뀌어 있었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청와대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한 달 뒤, 그는 조흥은행 본점에 머리띠를 매고 앉아 있다.

조흥은행 매각은 경제적 논리로만 따지면, 시빗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고돼 왔던 것이기에 지금 화제가 된다면 근로자들의 고용승계 정도가 돼야 할 것이다. 구조조정은 당하는 사람에겐 참을 수 없는 것이지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조흥은행 직원들과 상급 단체인 노총은 예금자를 담보로 집단행동을 벌이게 됐는가. 그것은 1차로 노 대통령 스스로 이 문제에 개입해 조흥은행과 노총에 ‘오해’를 살 만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좀더 거시적으로 보면 현 정부가 집권 이후‘목소리 크고 집단행동에 나서면 무엇이든 수용해준다’는 이상한 전통을 만들어 준 게 원인이다.

그 사례는 두산중공업, 철도 노사 분규, 화물연대 운송거부 사태 외에도 무수히 많다. 때문에 노동계에서는 현 정부 들어서‘깽판 치면’선명(鮮明)이요, 합리를 주장하면 어용(御用)이 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더구나 현 정부, 특히 청와대 주변에는 그 어느 때보다 민주노총 출신이 많다. 민노총 출신이 권력 주변에 진입한 게 이번파업의 원인은 아니겠지만, 1997년 이후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노사정위원회 등에 상시적으로 참여, 진짜‘대화’와‘타협’을 하려고 했던 한국노총을 자극했던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정부는 조흥은행 문제를 반드시 법과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문제는 국가 신인도(信認度)와 직결돼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강하고 누구에게는 약하다는 소리도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 스스로 목소리 크고 집단행동에 나서면 대화와 타협을 앞세우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주장에는 법과 원칙을 내세우지 않았는지 반성해봐야 한다.

‘신문만 안 보면 다 잘되고 있다’는 생각에 혹시 지도자가 사로잡혀 있다면, 참모들이“이것은 꼭 보셔야 합니다”라고 권유해야 한다.


(문갑식 사회부 차장 대우 gsmoon@chosun.com )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