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다만 수행을 계속할 뿐입니다
몇 개의 장애물로 나의 기도는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 이번에 단식기도를 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제일 처음에 기도를 시작할 때는 굶주리는 북한동포들의 아픔을 내가 함께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굶는데 나는 먹고 있다면 그들의 아픔을 내가 온전하게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식기도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첫 번째, 그들과 배고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것, 두 번째, 그들의 고통을 내가 함께 느낌으로 해서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기 위한 것, 세 번째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큰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큰 기적이 일어나려면 내 기도가 간절해서 천지신명이 감응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먹을 것 다 먹고 내 입을 것 다 입으면서 기도한다면 어떻게 천지신명이 감응하겠습니까.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늘이 감동하여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단식을 하면서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한지 3․7일이 되었을 때 ‘아, 이제 드디어 해결의 길이 열리는구나.’ 하는데 그 옥수수 5만 톤 지원 사건이 발생하면서 주어도 안 받겠다는데 뭣 하러 주느냐며 여론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주저앉지 않고 또 다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안 되는 와중에 더 노력을 했습니다. 중요한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기도 수십 번, 청와대 등 방문한 곳만도 여러 곳이었습니다.
그런 결과로 기도한지 7․7일이 되었을 때 이대통령이 국회개원연설에서 대북인도적 지원을 할 용의가 있으며 6․15선언도 논의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북쪽에서도 민간단체의 인도적 지원 식량은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이 터져서 지금까지의 수고가 무색하게 도루묵이 되어 버렸습니다. 새로운 지원은커녕 기존의 교류와 협력마저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럴 때 주저앉느냐 아니면 다시 일어서느냐 하는 것은 수행자의 견고한 믿음과 정진의 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왕의 유혹을 물리친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 하지만 누구라도 덜어줄 수 있는 고통
지금 북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진도 아니고 해일도 아니고 태풍도 아니고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사고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식량만 주면 내일이라도 해결될 일입니다. 그렇다고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이 이 세상에 식량이 없어서 생기는 일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식량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 닫혀있어서 문제가 됩니다. 가진 자는 말 합니다.
“야, 네가 궁하면 네가 나한테 도움을 요청해야지. 왜 굶는 주제에 도리어 큰소리치느냐. 필요하면 달라 해라, 줄 테니까.”
인사를 듣고 싶은 마음은 가진 자의 오만입니다. 만약 가진 자가 이렇게 나오면, 아쉬운 쪽에서
“아이고 죄송합니다. 배고픈데 좀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입니다. 그런데 아쉬운 쪽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뭐 거지냐? 안 먹고 말지. 굶어죽었으면 굶어죽었지 너한테는 달라 안 그래. 네 것은 줘도 안 받아!”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대응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번 일으킨 자기 마음을 돌이키지 못 하고 그 마음을 움켜쥐고 계속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본인이 제기한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내가 옳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들 또한 자기가 한 게 옳다 하며 서로 주장을 하니까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이렇게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는데도 한국정부도 북한정부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책임을 지지 않기는 중국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정부가 올해 들어와서 식량수출을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중국이 북한에 식량수출을 금지하니까 우리 JTS부터도 중국의 식량을 구입해서 지원해야 하는데 모금 시작한지 한 달이 되었는데도 중국에서 북한으로 식량을 지원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국수 등 비싼 식품을 구입해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중국정부는 이렇게 된 데 대한 책임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책임의식이 없습니다. 내 식량 가지고 내가 안 팔겠다는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말 할 뿐입니다.
일본은 비축해 둔 식량이 200만 톤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굶어죽는다고 해도 한 톨도 내 놓지 않습니다. 북한이 일본 사람들을 십여 명이나 납치해서 돌려주지도 않고 사과도 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런 북한에 쌀을 주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일본은 일본대로 옳고 중국은 중국대로 옳고 북한은 북한대로 옳습니다. 또한 한국은 한국대로 옳습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은 어떻습니까. 유가가 오르고 온갖 물가가 다 올라서 나 살기도 바쁩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 예쁜 짓도 안하는데 거기 줄 게 어디 있나”,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의식 있는 시민단체 사람들은 미국산 수입쇠고기 문제로 촛불시위하기에도 바쁜데 무슨 북한 식량난 이슈를 꺼내서 촛불민심을 분산시키려 하느냐고 말합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로 사람이 죽었다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북한정부의 책임입니다. 반면 북한정부가 볼 때는 이것은 한국에 들어선 새 정부의 잘못된 통일정책의 책임이고 미 제국주의자들의 책임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들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만 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으면 누군가가 나서서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습니다.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가해자들입니다. 그런데 나부터도 그렇지만, 여러분들 중 누구도 이 북한동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식, 가해의식이 없습니다. 죄의식이 없습니다. 불교의 인연법으로 따지면 지은 죄가 있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수십만 명 죽인 죄를 그대로 다 받는다면 우리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다생겁래로 고통을 겪든지 아니면 지금 지진이 일어나든지 태풍이 불든지 화산이 터지든지 전염병이 돌든지 내부에 불화가 생기든지 해서 큰 재앙이 닥치는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모릅니다. 자기가 지은 죄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죄 값을 받으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겠습니까. 그러니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나의 기도는 이제 북한동포를 넘어섰습니다. 처음에는 북한동포가 불쌍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지금은 북한동포보다 더 불쌍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바로 우리들입니다. 죄를 지어놓고도 자신이 죄를 지은 줄 모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받을 과보를 생각하면 무서워서 소름이 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지은 죄를 모르는데, 죄 값을 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아우성이 대단하겠지요. 그러니 그들을 위하여 그 모든 과보를 제가 대신 받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대속(代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십자가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도 죄 지은 줄을 모르니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대신 저들의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대속의 희생정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크리스찬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자기가 대신 짊어진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까 이제 우리는 아무 죄도 없다. 마음 놓고 편히 놀자. 죄는 예수님께서 다 받았으니까 예수님만 믿으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지옥 갈 일이 없으니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며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칩니다. 이렇듯 오늘날의 기독교는 개인의 복을 비는 기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은 오늘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대속사상이란 것,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49일 기도 이전에는 북한에 있는 동포들의 아픔을 생각하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내 마음이 많이 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회피한 이쪽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더 걱정합니다. 누군가가 이 죄를 짊어져 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 재앙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도를 마치려고 하다가 더 계속 기도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참회할 때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다 참회한다.”고 합니다. 모르고 지은 죄가 사실은 더 큽니다. 또 이것은 지장보살의 지옥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발원이기도 합니다. 지장보살은 중생들이 자기가 지은 죄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으며 아우성을 치니까 그 지옥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스스로 지옥으로 가서 그들을 구제하고 자신이 그 모든 고통을 대신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의 단식기도는 처음에는 피해자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동체대비사상으로 출발해서 지금은 가해자의 죄를 대신 짊어지겠다는 대속사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똑같은 법문을 듣고도 그것을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듯이 우리가 기도를 할 때나 수행을 할 때도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각자에게 다가오는 깨달음이 다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번 명상수련 한 번에 만족하지 마시고 내년에 또 와서 정진하면 더 큰 뉘우침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해에 또 와서 정진하면 더 큰 깨우침을, 더 큰 뉘우침을, 더 큰 자기 돌아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법당까지 오는 수고는 법문을 듣고 갈 때 얻어가는 깨달음의 기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오늘 당장에 죽더라도 삶에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정진을 해야 합니다. 음식을 굶는다든지 잠을 안 잔다든지 하는 이런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음식을 굶어보니까, 굶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음식 굶는 것만으로는 저절로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식을 굶는다고 마음이 더 고요해지고 더 선정에 드는 게 아니라, 먹고 싶은 욕구가 지나치게 억압되다보니까 오히려 신경이 더 예민해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신경질이 더 많아집니다. 없어진 줄 알았던 성질이 저 깊은 무의식에 숨어 있다가 이게 오히려 드러나게 됩니다. 그 때 그런 자기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식은 수행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 자기가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어, 이런 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구나. 어, 이 정도 궁하니까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구나.’ 이렇게 자기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정진하면서 다리가 아프니까, 가슴이 답답하니까 성질이 막 치솟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 나에게 이런 성질이 숨겨져 있구나. 알았다.’ 하고 흘려보내셔야 합니다.
지금 저는 다만 수행을 계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면 점점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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