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혹세무민 방조하는 정부........ 김영봉 (2003.06.02)
고 문일평 선생의 기록(史外異聞)에 의하면 1890~95년간 고종임금의 외부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산도’가 귀국하여 ‘극동회상록’이라는 조선견문기를 남겼다. 책 중 산도는 조선의 모든 산이 독산(禿山), 즉 빨갛게 허울을 벗었음을 가장 먼저 목격한다. 신기하여 조선인사에게 “귀국은 어이하여 산에 수목을 배양하지 않는가” 하고 물었다. 그 인사 가로되
“해변에 삼림을 배양하면 외국인이 엿볼 것이요, 산중에 삼림을 배양하면 호표(虎豹)의 환(患)이 염려되노라.”
최근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국가 사업들의 행로를 보며 오늘날 한국인의 인식수준이 백년 전 조선시대와 얼마나 다른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특정집단이 어느 날 그들의 가치만이 절대적이라 포고하고 투쟁, 관철할 것을 선언한다. 주도자들은 단식, 삼보일배 같은 의식(儀式)을 시작하고 이들을 맹신하고 쫓는 백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든다. 마지막에 대통령께서 기왕에 유효한 절차를 거쳐 완료를 앞둔 사업을 백지화, 재검토할 것을 지시한다.
NEIS는 다른 사람 아닌 선생님들이 반대를 주동했다. 보건, 학사의 신상자료를 중앙정보망에 올리면 해킹되고 인권침해할 우려가 있으니 시스템을 정지시키자는 것이다. 이것은 산불이 무서우니 민둥산을 만들자는 주장과 많이 다른 것인가? 창문이 있으면 엿보는 자가 있듯이 사이버 시대에 정보해킹자는 피할 수 없는 존재다. 21세기 오늘날 문명의 이기를 폐기할 것을 가르치는 교사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고도 또 놀랍다.
한국은 세계가 알아주는 정보첨단국이다. 은행 증권계좌, 카드회사 고객자료, 기업 기술자료, 병원 진료자료 등 직업해커들이 노릴 자료는 얼마든지 있다. 또 정부가 국민을 사찰하고자 끝내 자료를 엿보겠다면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들에게 학생 신상자료가 더 매력적일 이유도 없고 C/S 시스템이 더 안전하지도 않다고 한다.
시민인권이 절체절명의 가치라면 왜 NEIS뿐인가. 국가는 특별법을 만들어 주민등록·국세청·경찰청·검찰청·법원 등 모든 프라이버시 침해기관의 자료입력을 금지시키고 민간부문 전산자료도 완전 통제해야 한다. 그리하여 수기(手記)문명 시대로 돌아가 북한처럼 살 일이다.
이제 새만금 사업이 NEIS의 기막힌 여로를 되풀이할 차례다. 환경파괴의 위험이 있으니 1조4000억을 투자해 다 막아가는 방조제를 헐고 갯벌을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바람을 타고 있다. ‘사라진 갯벌은 다시 복구할 수 없다’ ‘철새, 동물들에게 못할 짓인데 얻는 땅덩이의 가치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이타(利他)적 변설 앞에 이성적 가치계산은 얼마나 천박한가. 향후 정부가 어떤 향배(向背)를 보일지 로켓 과학자 아니라도 예측할 수 있다.
환경이 절체절명의 가치라면 인간은 원시동굴시대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인류진보의 역사 자체가 자연정복의 과정이고 자연소모, 자연파괴 없는 생산은 없다. 환경운동가들이 새만금 갯벌의 환경적 중요성이야 따질 수 있겠지만 어떻게 간척지의 ‘경제적 가치’까지 운위할 자격이 있겠는가. 좁은 땅덩이에 인총이 넘치는 우리는 산을 헐고 하천을 개간, 쓸 땅 못 쓸 땅 다 이용하는데도 땅값은 세계 최고다. 산천으로 꽉 막힌 우리나라에서 글로벌 시대 농업다운 농업을 할 수 있는 땅은 현대의 서산간척지 정도나 꼽힐 것이다. 새만금 땅은 농지로 이용될 수도, 또는 주거지·공장·공원·골프장으로 전용될 수도 있다.
전교조·종교인·시민단체들은 각자의 양심을 표현하고 정치적 목적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와 목적처럼 다른 집단의 가치, 목적을 동등하게 인정할 때에야 진정한 양심인, 양심단체로서 설 수 있다. DJ정부 말기 이래 목소리 높은 자의 극단투쟁과 선전공작은 나날이 극성스러워지고, 비례하여 말없는 다수의 의사는 도용 및 유린된다. 망국을 앞둔 조선말기 때에도 이런 혹세무민에 놀아나고 방조하는 정부는 없었다고 본다.
(김영봉 / 중앙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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