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다시보기
법륜 스님 / 본지 발행인
오늘은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한문 그대로 해석을 하면 ‘행을 닦는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닦는다는 것은 거울을 닦는다, 유리창을 닦는다. 방바닥을 닦는다, 라고 할 때처럼 더러운 것이 깨끗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닦는다는 말은 나쁜 것을 좋게 만든다, 더러운 것이 깨끗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을 닦는다 할 때는 바로 괴로운 마음, 슬프고 화나고 짜증나고 미운 마음들이 결국은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상태로 변하도록 닦는다는 의미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행’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몸으로 움직이는 행이 있고, 말로 하는 행이 있고, 뜻으로 짓는 행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신구의(身口意)라 합니다. 그러니까 업의 원인이 ‘행’입니다. ‘행’을 하게 되면 반드시 거기엔 ‘업’이 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행을 닦는다 하는 것은 업이 지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일으켜서 행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업이 지어지는데 우리가 그 업을 받지 않으려면 업을 짓지 말아야 하고, 업을 짓지 않으려면 바로 행을 닦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무지를 깨뜨리게 되면 바로 ‘행’이 유위의 ‘행’이 아니라 무위의 ‘행’이 되기 때문에 그 결과에 아무런 흔적이 없게 됩니다.
자, 좀 더 쉽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몸으로 짓는 행’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업이 가장 큰 것은 살생하는 것입니다. 죽이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이런 것들이 다 몸으로 짓는 행의 첫째입니다. 또 몸으로 짓는 행은 도둑질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고, 강제로 뺏는 것도 몸으로 짓는 행입니다. 다음은 삿된 음행입니다.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를 강제로 추행하거나 폭행 하는 것, 부인이나 남편을 두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 자기 아내나 남편 또는 주위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런 것들이 몸으로 짓는 행입니다. 이렇게 몸으로 짓는 행은 많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살생, 투도, 사음입니다.
두 번째, 말로 짓는 행이 있습니다. ‘말로 짓는 행’ 가운데 첫째가 거짓말 이예요. 거짓말을 한다거나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둘째는 두 가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 가서는 이 말하고, 저기 가서는 저 말하는 경우지요. 그렇게 싸움을 붙이고는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자기만 빠져나가는 이런 것들을 ‘양설’ 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꾸며서 말하는 것, 아양 떠는 것, 번드르르한 말을 해서 뭔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앞에서는 아양을 떨고 뒤에 가서는 욕하는 것, 사실이 아닌 것을 꾸며 가지고 보기 좋게, 듣기 좋게 말하는 것을 ‘기어’라 말합니다. 또, 악담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욕하고 폭언을 합니다. 죽일 놈, 살릴 놈,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온갖 욕을 하거나 욕뿐만 아니라 저주하거나 협박, 공갈하는 경우를 일러서 ‘악구’라 합니다. 이렇게 말로, 입으로 짓는 업을 일러서 망어, 양설, 기어, 악구라고 합니다. 이것이 입으로 짓는 업입니다.
세 번째, 뜻으로 짓는 업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탐욕, 탐심입니다. 둘째가 진애,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 치심 또는 우치라고 하는데 어리석고 미련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뜻으로 짓는 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신․구․의, 세 가지 업, 삼업을 짓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업을 짓고 업의 결과물, 과보를 받는데 그 과보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나타나는 괴로움을 ‘삼악도’라고 합니다. 지옥, 아귀, 축생 이것을 삼악도라고 합니다. 즉, 갖가지 극한적인 고통에 처하게 되면 그것을 ‘지옥’이라고 하고, 여러 재앙을 만나서 하는 게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아귀도’에 떨어졌다고 하고, 어리석게 사는 것, 잘 한다고 했는데 매번 결과가 나빠지는 경우, 속된 말로 ‘재수 참 없다’하는 경우를 ‘축생도’라고 하지요. 이렇게 우리들은 업을 지으면 삼악도의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갖가지 괴로움은 밖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고, 누가 벌주는 것도 아니고, 바로 이렇게 우리들이 몸과 말과 뜻으로 잘못된 행을 해서 그 인연으로 나타난 결과가 바로 삼악도입니다. 바로 우리들 인생이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했을 때, 제일 먼저 내는 원이 바로 ‘원아영리 삼악도’ 입니다. ‘원하옵나니 영원히 삼악도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벗어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원아속단 탐진치’ 탐․진․치의 삼독을 끊어야 합니다.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나타난 행위가 열 가지 악, 십악입니다. 십악이란 ‘살생, 투도, 사음, 망어, 기어, 양설, 악구, 탐애, 진애, 우치’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멈춰야만 삼악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열 가지 행을 짓지 않는 반면, 열 가지 복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살생하지 아니하고 방생하며, 도둑질하지 아니하고 보시하며, 사음하지 아니하고 그 몸을 청정히 하며, 망어하지 아니하고 진실을 말하며, 두 가지 말하지 않고 한 가지 말을 하고, 꾸며서 말하지 아니하고, 악담하지 아니하고 자비롭게 말하고, 욕심과 탐심을 내지 아니하며, 화내고 짜증내지 아니하며, 어리석지 아니하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이러한 삼악도의 고통이 사라지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내 행동을 전환 시키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구․의 삼업을 짓는 우리 행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행의 밑바닥, 이러한 어리석은 행이 나타나는 그 밑바닥에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행을 닦는다는 것은 곧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수행’이라는 것은 ‘수심(修’心)’이 됩니다. 이 마음이 어리석으면 신․구․의 삼업을 짓게 되고, 이 마음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되면 바로 신구의 삼업을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자신이 행복하기를 또는 자신의 삶이 자유롭기를 원하는데 도리어 갖가지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어릴 때 보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좋아질 거라고, 시집가면 안 갈 때 보다 더 좋아질 거라고, 자식은 낳지 않는 것 보다 낳는 것이 좋아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내 인생이 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계속하게 되는데, 살다보면 그것들이 도리어 화근이 되지요.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돈 벌려고 주식 투자했는데 그것 때문에 돈도 잃고, 부부간에 다툼도 생기고, 갖가지 괴로움도 생깁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온갖 문제가 발생한단 말예요. 노름을 해도 잃었을 땐 잃은 대로 나쁘고, 또 따도 좋은 건 잠깐이고 또 금방 문제가 생기지요.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어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그게 도리어 화근이 되어서 가정불화가 생기고 친구가 등 돌려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잖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행복인 줄 알았는데 마치 쥐가 쥐약을 먹듯이 다른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야 갖가지 재앙이 다 없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측하는 결과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는 욕심대로 뜻을 이루려고 하니까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지요. 그러나 욕심을 버리게 되면 오히려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수행의 한 예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어떤 보살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 보살님은 자신이 다니는 절 살림의 기둥 같은 역할을 하는 대보살이었어요. 초파일이면 연등 보시를 적어도 한 백장쯤은 해오시고, 방생 간다하면 차 한 대쯤 되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절에 다닌 지도 오래되고 나이도 한 쉰 살이 넘으니 절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지요. 그리고 남편도 정부 기관에서 직급이 높은 분이셨어요. 그러니 어깨에 힘주고 살아오셨어요. 저희가 맨 처음 법당을 냈을 때 이 보살님과 인연이 되었어요. 제가 처음에 법당을 냈을 때는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다방이고, 3층은 당구장이고, 4층은 조그만 비밀 댄스홀인 건물의 그 댄스홀, 2층을 월세 20만 원에 전세를 얻었습니다. 조그만 부엌과 열 평 정도의 법당, 빨간 비닐장판이 깔린 상태를 어느 하나 고치지 않고 관세음보살 그림하나 걸어 놓고 시작하였지요. 어쩌다 오는 신도들도 열 명 중 여덟 명은 삐죽이 문 열어봤다가 가버리곤 했답니다. 그런데 그 대보살님이 이런 절에 나오겠어요? 그런데 반야심경 강의를 했을 때 그분이 오시게 됐습니다. 이유는 남편이 비리에 연루되어 직장에서 그만 퇴직을 당하셨어요. 아내들은 남편이 성공하면 그것이 마치 자기가 그런 냥 생각하고 남편이 잘리면 마치 자기가 잘린 양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그 대보살님이 기가 죽어 창피해서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반야심경 강의를 한다니까 30년 절에 다녀도 반야심경 뜻도 잘 모르니까 들으러 왔던 것이지요. 그렇게 그 보살님이 와서 공부를 해보니 반야심경에 무궁무진한 뜻이 담겨 있던 겁니다. 재미를 붙여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집이 잘못되려 그랬는지 남편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는데 6개월 만에 회사가 부도났어요. 아내는 남편이 돈 못 벌어오는 것만 해도 속이 타는데, 빚쟁이가 집에 쳐들어 와서 멱살을 쥐고 돈 내 놓으라 하지, 더구나 남편은 도망가서 집에 들어오지도 않지 그러니까 억울하고 분한 것이 터지게 되죠. 한편으로는 자기 남편을 자랑하면서 살아왔는데 또 한편으로는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살았던 겁니다. 그러니 남편이 돌아오면 싸움이 벌어지게 되고, 남편은 아내가 직장 떨어지고 돈 떨어지니까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싸움이 커지죠. 아이들은 가출을 하고. 그러니 그 보살님 입장에서는 30년을 절에 다녔는데 집이 이렇게 되면 부처님도 원망스럽죠. 그렇게 보시 많이 하고 열심히 절에 다녔는데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됐나, 또 전생에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집에 시집와서 저런 남편을 만나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나, 얼마나 박복하면 이런 고생을 하는가 하고 자기 신세타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를 하시라고 했더니 영험도 없는 기도는 뭣 하러하겠느냐고 말하는 겁니다. 반야심경 배워서 좋던 게 집안에 재앙이 오니까 불교의 지식적인 것에는 심취하면서도 기도에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께 다음과 같은 기도법을 일러드렸습니다.
‘이러한 재앙이 나 때문에 온 거다. 내가 박복해서 이런 재앙이 온 것이다. 망한 것은 남편 잘못이 아니고 내 잘못이다.’
그러니 이 보살님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 집에서 가만히 애 키우고 절에 다녔을 뿐이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 라고 할 밖에 없지요. 그래서 저는,
“바깥으로 드러난 현상은 그렇다. 하지만 당신이 박복해서 그러니 복을 지어야 된다. 첫째는 참회를 하라. 당신이 잘못해 놓고 남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있으니 당신이 참회를 해라. 두 번째는 복을 지어야 한다. 보시를 해야 한다. 지어 놓은 게 없는 박복한 사람이라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으니 참회를 해야 하고, 두 번째는 복을 지어야 되니 보시를 해야 한다. 보시를 하고 봉사를 해야 한다. 지금은 망해 가지고 끼니도 때우기 어렵다면 오늘 당신이 여기 오려고 가지고 온 차비라도 보시를 하고 걸어가라. 그렇게 해야 이 박복을 면할 수가 있다.”
그래도 30년 절에 다니며 기도한 신심이 있으니까 눈물이 나고 억울하고 분하지만 보살님은 그걸 따라 했어요. 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 기도문이 내 것 같지 않겠지요. 처음에는 기도문이 머리에 들어오겠어요? 그러나 기도를 하면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결혼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하나하나 돌이켜 보게 되고 거기에 바로 이런 기도문이 너무나 자기 삶을 잘 일러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내가 왜 이렇게 인생을 바보같이 살았을까? 지난 30년 어리석게 살았구나. 그저 내가 옳다하는 내 생각에만 사로잡혀 살았지, 내가 남편을 이해하거나 남편을 한번도 제대로 본적이 없었구나. 나 같은 여자하고 사는 남편이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겠나? 이런 생각이 나면서 참회의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과정에 한 6개월쯤 지나서 또 부도가 나버렸어요. 또 부도가 나니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겠어요? ‘또 일을 저질렀구나!’ 이렇게 될 수 있는데 보살님은 기도문에 대해서 딱 감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고 내가 박복해서 남편 일이 또 안됐구나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남편이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이 일이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으로 된 것이었어요. 그래서 남편한테 “죄송합니다, 집안 걱정하지 말고 몸이나 조심하세요.” 하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게 되었어요. 빚쟁이가 빚을 받으러 집으로 오고 집에 와서 가구란 가구에 딱지를 다 붙이고, 멱살잡고, 욕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전에 같으면 같이 싸웠는데 싹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욕을 해도 다 받아들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백번 사과하니까 빚쟁이들도 상대가 겸손하고, 사는 꼴이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살고 있으니 흥분이 가라앉죠. 이렇게 되니 아이들과도 부부관계도 좋아지게 됐어요. 남편은 그전에는 한번도 아내를 인정해 주지 않고 무시했는데 아내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지요. 이렇게 해서 집이 풍비박산이 될 일 앞에서 부부가 화합이 되고, 아이들로 가정으로 돌아오니 가족화합이 됐어요. 인생이 새로운 행복으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 것인가? 세속에 있다고 해서 수행에 조금도 불리한 게 아니고, 부도가 났거나, 가정에 불화가 생기거나, 애가 사고를 치거나, 사람이 죽는다 해서 꼭 불행한 게 아닙니다. 선혜동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발심을 했고 부처님께서도 길거리에 나가서 늙고 병들고 죽는걸 보고 발심을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대끼는 모든 것들이 수행의 계기가 됩니다.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마저도 돌이키면 다 수행의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피력은 누구나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는 누구나 다 행하면 공덕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런 길을 가지 않을 뿐이지요. 이렇게 되면 바로 부처님을 보기만 해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거리낌 하나 없는 이런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이 절로 나오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찬탄과 공경이 절로 나오게 되고, 부처님 법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이 절로 나오고, 부처님 제자 된 것이 자랑스럽게 됩니다.
자, 수행은 이런 큰 효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100일 기도한다’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뭔가 복을 빌고 욕심을 채우는 기도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참회 기도이며 자기를 돌이켜 깨우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나도 부처님 같이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그분은 맨발로 다니시고, 다 떨어진 옷을 입으시고, 걸식을 하시고, 나무 밑에서 주무시고, 가족 관계를 떠나 홀로 계셨지만은 그분은 외롭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고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과 비교해 보면 지금 우리가 가진 건 그분보다 많지요? 신발도 그분보다 많고 옷도 많고 집도 좋고 음식도 좋고 가족도 많고, 그런데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 하면 그 원인은 더 이상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을 잘못가진데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아무리 못나서 모든 걸 다 내놓고 길거리에 맨몸뚱이로 나 앉았다 하더라도 부처님보다는 낫겠지요. 입던 옷 몇 벌이라도 있고 신발이라도 몇 개 있고 그래도 아내하고 남편 자식하고 함께 힘을 합할 사람도 몇 명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것을 분명히 아시고 정진 잘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월간정토 11월호 이달의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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