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파업하기 좋은 나라......... 정갑영 (2003.06.13)
미국의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77년 겨울 조지 워싱턴 장군은 펜실베이니아의 벨리 포지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매서운 추위 속에 영국군과 힘겨운 전투를 치러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군량(軍糧)까지 부족해 병사들이 아사(餓死)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군대를 처참하게 무력화한 또 다른 적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군을 위해 주 의회가 제정한 시장(市場) 통제법이었다. 식량을 포함한 군수품의 가격을 통제하여 워싱턴을 도우려 했지만, 시장은 전혀 다르게 반응하였기 때문이다.
식량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오히려 적군에게 금을 받고 팔아버리기도 했다. 당시 워싱턴의 참패에 교훈을 얻은 대륙 의회는 “향후 시장을 거스르는 어떤 법령도 제정하지 말자”고 결의한 바 있다. 경제정책의 유효성을 이해하게 된 역사적 사건의 하나다.
경제는 법이나 명령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경제는 정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군을 도우려는 정책이 오히려 굶주림만 더 심화시키는 ‘벨리 포지의 역설(逆說)’을 가져왔다.
어느 정부도 경제를 불안하게 만들겠다는 정책을 도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는 정책의도와는 상반된 방향으로 움직일 때가 많다. 참여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로 동북아 중심국가를 건설하고, 지역간 사회적 불균형이 개선된 복지국가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 더 이상 해외요인이나, 취임 초의 혼란이라고 탓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말의 성찬(盛饌)이나 토론만으로 경제의 흐름을 바꿔 놓을 수도 없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경제를 살리려면 궁극적으로 참여정부의 정책코드가 시장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경제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시장의 중심축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기업가와 근로자, 소비자의 마음에 정책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심어 주어야만 한다. 그곳이 바로 경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정책이 불확실하고, 신뢰를 주지 못하면 경제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수년간의 국책사업이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판에, 어느 용감한 기업가가 투자를 감행하겠는가. 그 많은 나라 중에 하필이면 한국을 투자대상으로 선택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특정집단에 편향된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면, 경제가 불안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친노(親勞)의 편향된 시각으로는 기업가를 움직일 수 없고, 투자를 유치할 수 없으며, 저성장의 굴레를 벗어날 수도 없다. 동북아 중심국가도, 복지국가도 모두 성장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얘기들이다.
설익은 이념이나 철학으로 국민경제를 실험하거나, 이미 실패한 다른 나라의 경험을 고집해서도 안 된다. 행여 친노(親勞) 정책이 실업자를 양산하는 ‘고노(苦勞)’ 정책으로 변질된다면, 또 하나의 역설이 등장하지 않겠는가.
당장 성장률이 1%포인트만 떨어져도 수만 명의 실업자가 증가한다. 그렇다고 친(親)기업을 주장하거나 근로자의 희생을 강요하자는 것이 아니다. 경제정책의 코드는 특정계층이 아니라 항상 시장에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엄격한 법과 원칙이 시장을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세계적 규범에 역행하고, 시장의 유연성을 수용하지 못하며, 고용과 성장에 부정적인 효과를 주는 정책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경기회복의 원동력이 되는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것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이상이 ‘파업하기 좋은 나라’의 현실로 변질된다면, 국내산업의 공동화(空洞化)만 심화될 뿐이다. 애국심만으로 국내기업을 붙들어 놓을 수도 없다. 경제난국은 세율이나 이자율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다양한 코드의 인재를 모아 시장 중심의 정책코드로 다시 뛰게 해야 한다.
(정갑영·연세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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