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사연이 있길 래 긴 밤 울고 있는가
외국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양평 인근에 있는 산에서 이틀 동안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 명상이 끝난 후 차 마시는 시간 각자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때 화제가 되었던 것이 명상 시간 내내 울어대고 있는 어떤 이름 모를 새였다. 차 마시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울고 있는데 다들 새소리에 문외한 들이라서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뻐꾸기나 부엉이 소리 보다는 짧고 그렇지만 굵고 깊은 톤으로 구슬프게 울어 대는 소리였다.
아무튼 저 새가 무슨 새인지는 모르지만 왜 우는 지에 대한 결론은 한결 같았다. 제 짝이 될 새를 기다리느라고 울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새는 다음 날 아침 공양시간 까지 밤 새 쉬지 않고 울어댔다. 아침 공양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그 새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얼마나 목이 아플까?’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리 구슬프게 울어댈까?’ 새소리 때문에 각자 명상 시간 내내 의문이 절로 들었지만 그냥 이리 저리 망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김일상 교무님이 쓴 ‘마음의 등불’이라는 책을 보면 야명조(夜鳴鳥)이야기가 나온다.
밤이면 밤마다 숨이 넘어갈 듯 애절하게 우는 새가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밤에만 우는 새라하여 야명조(夜鳴鳥)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야명조가 슬피 우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의 하나는 집이 없기 때문에 추위에 떨려서 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의 울음이라 한다.
야명조의 울음 소리는 ‘내일 해가 뜨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집을 만들어야지, 내일 해가 떠오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집부터 마련해야지’하는 탄식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해가 떠오르면, 밤을 지새우며 울었기 때문에 배가 고파 먹이를 먼저 찾아 헤매이게 되고, 먹을 것을 먹을 만큼 먹으면 식곤증과 졸음이 겹쳐 잠깐 잠을 잔 뒤에 집을 만들어야지 하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다보면 그만 자신도 모르게 석양이 가까울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말게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집을 만들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저녁의 먹이를 찾아 헤매이기도 바빠야 하는 결과를 낳아 다시 저녁을 맞게 되고, 다시 밤을 맞아 추위에 떨면서 울어야 하는 것을 반복한다고 한다.
가끔 외국을 여행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항상 마음에 다짐하는 것이 있다. 귀국하면 반드시 영어 학원 등록해야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얼마 시간이 지나면 그 다짐은 마음 속에 흔적 조차 없어진다. 두 달 후 독일에서 개최되는 한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초정이 왔다. 다시 영어 공부라는 화두가 생각났지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갔다 와서 해야겠다고 다시 미루어 본다. 아마도 야명조의 운명처럼 나에게 이생에서의 영어공부는 미루다가 끝나버릴 것 같다.
영어 공부도 중요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들을 우리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미루고 산다. 막상 무슨 일이 닥치기 전까지는 모르고 살겠지만 후회와 탄식할 일이 남아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스님들 끼리 모여 차담을 나누는데 어떤 노스님 이야기가 나왔다. 그 스님이 출가 한지 얼마 안 되었을 한 창 포교에 대한 열의가 충만해 있었다. 그 스님은 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천일 기도를 들어갔다. 기도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포교를 잘 하려면 큰 도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포교 도량 불사를 시작하였다. 몇 번의 천일 기도를 거쳐 시골에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짓고 하여 꽤 큰 도량을 건립하게 되었다.
불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는데 어느 덧 그 스님의 연세는 칠순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스님에게는 제자가 아무도 없었다. 젊은 제자에게 그 절을 물려주어 포교의 원력을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그 절이 유지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처음 불사를 시작할 때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라서 유지비가 많이 들지 않았는데 규모가 커지다 보니 운영비가 만만치 않게 들고 있다는 것이다. 또 장소도 시골이라 연세 드신 불자 분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나니 절에 오는 신도도 줄어 들고 불사 중심으로 사찰을 운영하다 보니 기존의 신도분들도 지쳐서 더 이상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포교라는 큰 뜻을 가지고 시작한 불사가 결국은 건물 유지라는 현실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그 마저도 여의치 않자 노쇠한 스님은 절을 매각하여 그 돈으로 작은 토굴하나 마련하여 남은 여생을 수행만 하다 죽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면서 무언가 많은 아쉬움이 남기도 하고 또 그 야명조 이야기와 함께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 전 불교용품점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천도재를 잘 지내기로 유명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스님 말씀에 따르면 요즘은 귀신이 사람보다 더 많아 졌다고 한다. 귀신이 많아 져서 음기가 더 강해지고 그래서 나라도 편치 않고 사람들도 많이 힘들어 한다고 한다. 내가 ‘스님같이 분이 천도재를 많이 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큰절에서도 천도재 많이 지내고 있는데’라고 물었다.
그 스님 말씀이 요즘은 귀신들이 너무 뺀질거린다고 한다. 왠만해서 재사로 그들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살아 있을 때부터 뺀질거려서 죽어서도 고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웃으게 소리로 듣고 말았지만 만약 그 귀신들이 있다면 아마 야명조의 심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면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갈까? 나 자신부터 오늘 하루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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