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라는 영화이야기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갔다. 시내의 한 백화점에서 여름 방학 때를 맞이하여 유령의 집을 만들었다고 하여 가족들과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재미있는 행사나 놀이거리가 그리 흔치 않았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온 몸이 쭈빗 서고 비명을 지르며 여기 저기 도망 다닌 기억이 난다. 유사한 경험이 또 있었는데 군에서 유격 훈련 받을 때 마지막 날 했던 담력 훈련이 있었다. 밤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껌껌한 숲속을 더듬 더듬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발목을 덥석 잡아 기겁을 한 적도 있었다. 아마 지금 다시 그 담력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갑자기 놀라게 하면 또 자지러지게 놀랄 것이다.
해마다 무더운 여름이 되면 극장가에는 우리의 온 몸을 싸늘하게 해주는 공포영화 한 두 편이 개봉된다. 점점 내용이나 효과 면에서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분명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무서운 대목에서는 저절로 몸이 움츠려 들게 만든다. 어렸을 적 즐겨 보던 전설의 고향과 문득 비교를 해보지만 요즘은 정말로 무서움을 느끼게 영화를 만든다.
아무리 무서운 공포 영화지만 정작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나 배우가 그 영화를 볼 때 그리 공포심이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내막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고 어떻게 분장하여 무슨 효과를 입혔는지 훤히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내심 즐길 것이다.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면 무서워해야 할 장면에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공포 영화 제작자가 자신이 만든 영화를 무서워하지 않듯 만약 우리도 우리 내면의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꿰뚫어 알고 있다면 감정과 생각이 만들어 내는 것들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을 수 있다.
흔히 우리들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 느낌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우리들은 감정과 생각 등이 일어날 때 그 내용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과 장면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관객과도 같다.
통찰(반야) 명상에서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의 상태나 느낌의 상태를 직시한다. 마음의 내용이나 느낌의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마음이나 느낌이 어떤 모습인지 즉 어떻게 일어나 반응하고 있는 지를 보게 된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통찰하는 힘의 차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는 만큼 어떤 상태에 대한 이해가 생긴다.
통찰력이 계발되면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느낌 등을 여러 조건과 작용의 복합적인 한 형태로 이해해서 보게 된다. 가령 화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본다고 하자. 일반적으로는 화가 난 상태에 빠져 버리거나 최소한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금 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화를 내고 있는데 화를 잘 낸 것인지 그렇지 못한 것이지 아니면 무엇 때문에 내가 화를 내게 되었나를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통찰의 수준으로 화를 내고 있고 상황을 본다면 현재 화나는 작용이 몸과 마음을 토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면서 그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여러 조건들을 토대로 또한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안다.
통찰이 진행되는 상태에서는 우선 생각이나 느낌의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어나 작용하는 상태를 보게 된다. 느낌이나 생각이 오온 즉 물질의 무더기, 감각 작용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정신적인 반응과 작용의 무더기, 의식의 무더기에 불과하다는 차원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더기 들이 무수한 조건과 원인에 의해 매순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이와 같은 통찰의 차원으로 냉철하게 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제작자가 영화를 보듯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등을 대하게 된다.
내용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발생하고 있는 상태를 보고 알기 때문에 생각이나 느낌의 내용에 크게 영향 받지 않게 된다.
마음을 어떤 대상에 집중시켜 어떤 하나의 마음 상태를 유지하여 공포나 괴로운 상태를 잠시 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그 상태를 유지하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통찰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파악하고 이해한다면 이해한 순간부터 이해한 만큼 마음은 가벼워 진다.
상윳따 니까야 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 천신이 부처님을 뵈러 와서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려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안의 엉킴이 있고, 밖의 엉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엉킴으로 뒤얽혀있습니다.
고따마시여, 당신께 그것을 여쭈오니
누가 이 엉킴을 풀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답하신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청정도론 1권 p121~122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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